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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은 깡통 대통령. 치안 지옥문이 열린다."
검은 상복이 청사 앞에 줄을 섰다. 갓 문을 연 중대범죄수사청 앞이었다. 개업식에 화환 대신 조화를 들고 온 셈이다. 그것도 제1야당 지도부가 단체로. 10월 2일, 뉴스토마토 〈끝장뉴스〉에서 황연실 앵커가 이 어이없는 장면에 대해 직격했다.
“어제 중대범죄 수사청 청사 앞에서 상복을 입은 국민의 힘 장동혁 대표가 쏟아낸 말입니다. 제1여야당 지도부가 새롭게 출범하는 중수청 앞에서 장례식 퍼레이드를 벌인 것도 모자라 내일은 도심 장외 집회까지 예고했습니다. 새 제도의 공백이 우려된다면 국정 감사에서 치밀하게 따져 입법으로 보완하고 청장 후보자가 부적격이라면 청문 회장에서 팩트를 제시해 검증하면 될 일입니다. 헌법과 법률이 제1야당에 부여한 가장 강력하고 합법적인 견제 역할은 모두 거부하고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그 저의가 뭡니까? 논리와 실력으로 정부를 견제할 자신이 없으니 공포를 조장하는 선동질이나 하는 거겠죠. 이러니 당내에서조차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는 것이라는 자조가 나오는 겁니다. 정작 속이 텅빈 채 소리만 요란한 깡통은 누굽니까?”
속이 시원한 독설이다. 다만 이 시원한 독설은 국민의힘에만 던지면 아깝다. 요즘 대통령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오른쪽에만 있지 않다. 왼쪽에서도 날아온다. 던지는 손은 달라도 돌의 모양은 비슷하다. 깡통 두드리는 소리도 비슷하다.
장례식은 죽은 것을 보내는 자리다. 중수청은 아직 사건 하나 맡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부고를 받은 기관.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다.
장동혁 대표는 '치안 지옥문'을 말했다. 지옥문을 봤다는 사람치고 근거는 없다. 통계도 없고, 사례도 없다. 상복과 구호만 있다. 공포를 팔려면 원래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
다음 날은 도심 장외집회란다. 장례식 다음은 행진이다. 순서는 제대로 지켰다. 상주 노릇은 성실하다. 야당에게는 원래 일터가 있다. 국회다. 그곳에 국정감사가 있고, 인사청문회가 있고, 법안 발의권이 있다. 헌법이 차려준 밥상이다. 가장 강력하고 합법적인 견제 수단이다. 그 밥상을 걷어차고 길바닥에 돗자리를 폈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국정감사는 귀찮다. 자료를 읽어야 한다. 숫자를 맞춰야 한다. 질의 하나에도 밤샘 준비가 든다. 청문회는 더 귀찮다. 후보자를 무너뜨리려면 진짜 팩트가 있어야 한다. 틀리면 망신이다. 반면에 거리는 편하다. 상복은 대여하면 된다. 구호는 다섯 글자면 된다. '깡통 대통령'. 틀려도 아무도 채점하지 않는다.
황 앵커의 말대로다. 논리와 실력으로 견제할 자신이 없으니 공포를 판다. 당 안에서조차 무능을 자인한 꼴이라는 한숨이 나온다. 상대를 깡통이라 부르려면 자기 통부터 두드려봐야 한다. 국민의힘이 두드려본 결과가 이 장외집회다. 텅, 텅.
보수는 왜 이렇게 다급할까. 답은 단순하다. 이 정부가 성공할까 봐 무섭다. 보수가 두려운 것은 이재명 정부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기본소득으로 삶의 바닥을 받친다. 공공주택으로 집 걱정을 덜어준다. 그러면서 투자와 수출, 첨단산업과 일자리까지 챙긴다. 이게 먹히면 보수의 간판 상품이 망한다.
"진보는 경제를 모른다."
수십 년을 이 한 줄로 장사했다. 복지를 늘리면 나라가 망한다. 기업이 떠난다. 성장이 멈춘다. 레코드판이 닳도록 틀었다. 그 판이 깨지면 다음 곡이 없다. 그래서 정책은 안 따지고 이름표부터 붙인다. 기본소득은 '화폐의 사회화'. 공공주택은 '토지의 사회화'. 결국 빨간 딱지다. 21세기에도 색칠놀이는 계속된다. 크레파스 색이 하나뿐이라는 게 문제다.
이들에게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1순위는 정권 탈환이다. 그러려면 민생이 어려워야 한다. 국민이 실망해야 한다. 나라가 잘되면 곤란한 정당.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여기까지는 익숙한 풍경이다. 진짜 볼거리는 왼쪽에 있다.
9월 12일, 추미애 경기도지사가 김지용 초대 중수청장 후보자 지명을 저격했다. 대통령이 내란 세력을 징벌해야 하는데 왜 그 세력에 업혀 전전긍긍하느냐고 했다. 후보자에게는 "한동훈과 한배를 탔던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같은 중수청이다. 오른쪽은 상복을 입었고, 왼쪽은 화살을 쐈다. 갓 태어난 기관이 양쪽에서 동시에 얻어맞았다. 이 정도면 중수청도 억울하다.
이후 김민석 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축소 운영 문제 등을 연일 꺼내 들었다. 당 대표와 도지사가 공개적으로 맞붙었다. 집안싸움이 대문 밖까지 들렸다.
박지원 의원이 정리에 나섰다. "문제는 추미애 지사."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다. "민주당의 장동혁 되지 마시고 민주당의 추미애가 되셔야 한다."
민주당의 장동혁. 이보다 아픈 말이 있을까. 상복 입고 청사 앞에 선 야당 대표와 같은 줄에 세워졌다. 박 의원은 댓글에서 더 짧게 덧붙였다. "대통령 공격이 수준 이상." 수준 이상. 칭찬처럼 들리지만 칭찬이 아니다.
일부 자칭 진보의 불만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
기업 투자를 늘리면 친재벌이다. 규제를 고치면 우클릭이다. 성장과 수출을 말하면 배신이다. 결론은 늘 정해져 있다. 그들이 허락하지 않은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가치를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진보의 해설자'라는 계급장을 잃을까 두렵다는 것이다.
이해는 간다. 오랫동안 진보 감별사, 해석권력을 누려왔으니. 누가 진짜 진보인지 판정하는 면허가 있었다. 정책이 나오면 해설했고, 정부가 움직이면 훈계했다. 그런데 이 정부는 감별소를 거치지 않는다. 검수 도장 없이 출고한다. 그리고 국민이 그 물건을 산다. 감별사로서는 영업 위기다. 자기 해설 없이도 잘 돌아가는 개혁. 그건 개혁이 아니라 반칙이다. 적어도 그들 눈에는.
보완수사권 논쟁도 그렇다. 핵심은 피해자 보호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수사기관의 권한 남용을 막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는 이 복잡한 문제를 구호 한 줄로 정리하고, 정부에 그대로 따르라고 한다. 안 따르면 배신이다. 그건 개혁이 아니다. 개혁의 이름을 빌린 갑질이다. 진보라는 간판을 단 또 하나의 기득권이다.
진영 안에는 멸칭까지 돈다. '문조털래유'. 문재인, 조국, 김어준, 정청래, 유시민의 이름을 엮었다. 상대 진영이 만든 말이 아니다. 같은 편끼리 만든 말이다. 오죽했으면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9월 18일, 미운 마음이 들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더라도 차라리 자신과 정부의 부족함을 탓해달라고 했다. 대통령이 "나를 때려라"라고 말해야 하는 집안. 이쯤 되면 집안이 아니라 격투장이다.
유시민 작가는 멸칭을 쓰는 이들을 '신발 속 돌멩이'에 빗댔다. 그 돌들이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킨다고 했다. 신발을 털고 돌을 빼내면 원래 속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박지원 의원은 유 작가에게도 한마디 했다. 전보다 훨씬 순화됐지만 아직도 그 돌멩이가 너무 크고 아프다고. 바라는 세상이 '윤석열 어게인'은 아니지 않느냐고. 돌멩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돌멩이였던 것이다.
이제 그림이 보인다. 오른쪽은 "혁명하는 것이냐"라고 외친다. 왼쪽 일부는 "배신자"라고 외친다. 서로 반대편을 보고 서 있다. 그런데 등을 맞대고 있다. 같은 사람을 겨누고 있다. 오른쪽은 되찾을 권력이 걱정이다. 왼쪽 일부는 빼앗길 계급장이 걱정이다. 메뉴는 다르지만 주방은 같다. 자기 밥그릇이다.
둘 다 국민의 삶은 부차적이다. 오른쪽에게 이 정부의 성공은 정권 탈환의 실패다. 왼쪽 일부에게 이 정부의 성공은 존재 이유의 실종이다. 그러니 둘 다 성공이 반갑지 않다. 서로 손 한 번 안 잡고도 기막히게 호흡이 맞는다.
이재명식 실용주의의 기준은 하나다. 국민에게 도움이 되느냐. 진보 교과서도, 보수 교과서도 펼치지 않는다. 복지가 필요하면 늘린다. 성장이 필요하면 끌어온다. 공공성이 필요하면 국가가 책임지고, 혁신이 필요하면 규제를 고친다. 이 단순함이 그들에겐 재앙이다. 이념 없이도 나라가 굴러간다는 게 증명되면, 이념을 팔던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하니까.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자. 청사 앞의 상복 행렬. 도청에서 날아온 화살. 집안끼리 주고받는 멸칭. 같은 계절, 같은 대통령을 두고 벌어진 일이다. 무대는 달라도 공연은 하나다. 깡통 경연대회. 참가자들은 저마다 열심히 두드린다. 한쪽은 '지옥문'으로, 다른 쪽은 '내란 세력에 업혔다'로. 소리 크기로 따지면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런데 이 대회에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 정작 국민의 고달픈 삶에는 관심이 단 1도 없다는 것이다. 실패해야 할 것은 국민을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다. 국민의 삶을 볼모로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낡은 정치다. 정작 속이 텅 빈 채 소리만 요란한 깡통은 누구인가. 이제 답은 하나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장 오른쪽에 가 있는 국민의힘과 왼쪽에 있는 추미애, 조국, 김어준, 유시민이 손을 맞잡고 대통령을, 정부를 공격하는 국면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