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AI생성 이미지(제미나이)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군사적 기여 방안을 검토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울을 넘어 전국 각지에서 파병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노동계·대학가·정치권의 목소리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지난 4일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첫 반대 성명을 시작으로, 일주일 만에 수도권과 영남권 등 지역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대학가로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서울 도심 곳곳서 잇단 기자회견
지난 5일 자주통일평화연대와 전국민중행동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에 파병 검토 자체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안지중 자주통일평화연대 집행위원장은 과거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강행 이후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던 사례를 거론하며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함재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정부가 P-8 해상초계기, 기뢰 탐지·폭발물처리반, 군수지원함 등 구체적인 전력 파견을 검토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는 것을 이중적 태도라고 비판했다.
같은 날 저녁에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집회를 열어 비전투 임무 파병이라 해도 군사 개입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행진을 이어갔다.
7일에는 사회대전환연대회의, 트럼프 규탄 국제민중행동 조직위원회,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시민사회 긴급행동 등 3개 단체가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다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108개 단체와 개인 1030명이 이름을 올린 연서명이 함께 발표됐다. 이백윤 노동당 공동대표는 어떤 명칭을 붙이더라도 군사 자산을 분쟁 지역에 보내는 순간 전쟁 당사자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이란계 독일인 활동가 아사라 브루킨스는 이란 정부와 이란 민중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폭격이 무고한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이상현 녹색당 대표 역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이후 지지율 하락 사례를 다시 언급하며 외교적 해법에 집중할 것을 정부에 주문했다.
이날 오후 광화문역 앞에서는 경기청년연대, 다만세 2030 등이 주최한 청년학생 긴급 집회도 별도로 열렸다.
“비전투도 파병”…경실련·참여연대 등 헌법 위반 지적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낸 경실련은 지난 4일 성명에서, 병력이 현지 작전에 투입될 경우 한국이 단순한 선박 보호국이 아니라 군사작전 참가국으로 인식돼 장병과 교민, 선박이 보복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헌법 제5조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국제평화 유지에 노력할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참여연대도 같은 날 논평을 내고 호르무즈 해협의 교전 상황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며, 미국의 대이란전에 대한 파병은 명백한 가담 행위라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평화너머 등도 지난 4일 함께 반대 논평과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대학가, 대자보·1인 시위로 확산
대학가에서도 진보 성향 학생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움직임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 진보대학생넷은 7일부터 11일까지 강원대 등 5개 거점국립대와 경희대·고려대·동국대·한양대 등 사립대를 포함한 전국 17개 대학에서 대자보 부착과 1인 피켓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대자보를 통해 명분도 국익도 없는 남의 전쟁터로 청년을 보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밝혔다. 장유진 진보대학생넷 집행위원장은 정부가 최근 비전투 임무는 참전이 아니라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데 대해 파병 현실화 우려가 커졌다고 말했다.
7일 동국대와 한양대, 경희대 정문 앞에서는 소속 학생들의 1인 시위가 잇따라 목격됐고, 부산에서도 사흘 전 청와대발 파병 검토 보도가 나온 직후 부산대 정문에 학생들이 작성한 규탄 대자보가 등장했다. 대자보에는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리기는 싫은데 미국의 요구를 외면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취지로 정부에 대한 충고가 담겼다. 서울지역 대학인권연합동아리 소속 대학생 심규원씨는 입대를 앞둔 청년으로서 파병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청년의 삶과 생명이 협상 카드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역으로 번지는 반대 목소리
수도권을 넘어 지역 시민사회의 반대 행동도 이어지고 있다.
인천에서는 8일 오전 민주노총 인천본부, 인천시민사회단체연대, 인천자주평화연대, 진보당·정의당 인천시당 등이 인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파병 검토 철회와 함께 한·미·일 다영역 훈련 ‘프리덤 에지’ 중단, 한일 지소미아 원점 재검토까지 요구했다. 이들은 호르무즈 파병과 프리덤 에지가 별개 사안이 아니라 한국군을 미국의 전쟁 수행 체계에 편입시키는 같은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김광호 민주노총 인천본부장은 군사 자산이 투입되는 순간 그것이 곧 파병이자 전쟁 개입이라며 헌법 5조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부산에서는 7일 진보당 부산시당이 출근길 지역 거점 11곳에서 동시다발 선전전을 벌였고, 경남도당도 국민을 사지로 내몰아선 안 된다는 성명을 냈다. 부산자주평화연대는 미국 영사관을 찾아 항의했으며, 부산평화연대는 미국이 자국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동원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울산에서는 같은 날 울산자주통일평화연대와 울산평화너머, 지역 노동계가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익과 국민 안전을 도외시한 굴종적 행보라고 규탄했다.
광주에서는 광주경실련이 7일 성명을 내고 '비전투'나 '항행 안전 지원'이라는 명칭만으로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며 파병 검토 중단과 평화적 해법을 촉구했다.
경상북도 포항에서는 진보당 포항시위원회가 7일 성명 발표와 함께 우현사거리에서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
경기 지역 시민단체들도 7일 별도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미국의 군사 전략에 무조건 편승하기보다 국민의 생명과 한반도 평화를 우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노동계·공무원노조도 잇단 성명
민주노총은 지난 5일 처음으로 반대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이후 인천·울산 등 지역본부 차원의 집회로 반대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도 4일 성명을 내고 이라크 파병 당시 명분이 됐던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사례를 언급하며 파병 논의의 즉각 중단을 요구했다.
공무원 노동계에서도 신중론을 앞세운 사실상의 반대 성명이 나왔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7일 “호르무즈에 우리 군을 보낼 이유는 없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고, 국가공무원노동조합도 같은 날 파병이 국민과 장병의 생명, 국가 이익이 걸린 중대 사안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정치권도 반응…여당은 신중 모드
야권을 중심으로 파병 반대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조국혁신당 신장식 대표는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파병 추진의 모든 단계에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겠다고 밝혔다. 진보당은 파병이 이뤄질 경우 우리 장병과 중동 교민, 기업, 선박, 나아가 국내 미군기지까지 보복과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은 앞서 지난 3월 중동 분쟁 지역 파병과 군사개입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반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 결정을 지켜보겠다”며 공식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다만 당내에서는 현실론도 나온다. 5선 중진 박지원 의원은 7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호르무즈 해협에서 우리 선박을 보호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비전투 병과 파병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취지로 말해, 당내 이견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한 시민은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이란전이 명분없는 침략 전쟁임을, 그리고 참전으로 인해 수백여 년에 걸쳐 진행될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침략 전쟁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보유와 테러 지원을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국, 호주, 폴란드 등 30여 개 국이 '자발적 동맹'으로 참전했다. 전쟁 결과 사담 후세인 정권은 축출됐으나, 무장 세력 난립과 이슬람국가(IS) 출현 등 극심한 정세 불안이 이어지며 수십만 명의 인명 피해와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었다. 그런데 훗날 대량살상무기(WMD)는 침략을 위해 꾸며진 미국의 거짓 정보였음이 드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