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하늘 아래, 영화와 영상의 미래를 논하는 세계 각국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7일(현지시간) 프랑스 니스 인근의 예술 마을 생폴드방스에서 열린 국제 영화·영상 정상회의 '뤼미에르 서밋' 현장이다.
행사장에는 51개국에서 189명의 문화예술계 인사가 모였다. 각국 문화장관은 물론 영화·영상 창작자 20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고, 데이나 월든 월트디즈니 컴퍼니 사장 겸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앨런 버그먼 디즈니 엔터테인먼트 스튜디오 부문 회장, 테드 사란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 등 글로벌 콘텐츠 산업을 움직이는 핵심 인사들도 참여했다.
이번 프랑스 생폴드방스에서 막을 올린 '뤼미에르 서밋'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행사였다. 영화의 발상지 프랑스가 주최하고, 한국 대통령이 공동의장을 맡았다. 51개국 189명이 모였고, 디즈니·넷플릭스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한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하루짜리 국제 정상회의였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무게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한 나라, 프랑스가 이런 자리를 만들면서 공동의장으로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한국을 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4월 방한해 직접 공동의장을 제안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즉흥적 결정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물에 가깝다.
그 배경에는 지난 10여 년간 누적된 한국 콘텐츠의 성적표가 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한국 드라마·영화·음악이 세계 시청자에게 도달하는 경로가 이미 상시화됐고, 칸·아카데미 같은 전통적 권위의 무대에서도 한국 창작자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됐다. 프랑스로서는 '영화 종주국'이라는 상징성만으로는 부족한 시대에, 실질적으로 산업을 흔들고 있는 파트너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은 그 조건에 부합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이번 서밋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결과물은 한국과 프랑스가 향후 5년간 각각 5억 유로, 8천억 원 규모를 영상산업에 투자하기로 한 '글로벌 영화·영상산업 투자협력 이니셔티브'다. 액수 자체도 작지 않지만, 더 주목할 지점은 이 투자가 '양자 협력'을 넘어 '세계로 확장'되는 모델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 콘텐츠의 해외 진출은 대체로 넷플릭스·디즈니 같은 미국 플랫폼에 콘텐츠를 '공급'하는 구조였다. 제작비를 플랫폼이 대고, 한국은 우수한 창작 역량을 제공하는 하청 구조에 가까웠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이번 이니셔티브가 실제로 작동한다면, 한국이 투자자이자 공동제작자로서 지분과 IP를 함께 쥐는 모델로 옮겨갈 여지가 생긴다. 액수의 크기보다 구조 전환의 신호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부 간 협력의 이면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의 참석이다. 정부가 상당한 공을 들여 성사시켰다는 점은, 이번 서밋이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라 실질적 비즈니스 매칭의 장이라는 정부의 인식을 보여준다. 국가 정상 간의 선언은 방향을 제시할 뿐, 실제 계약과 투자와 공동제작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국 기업이다. 창작자(이창동·정주리·설경구·전도연)와 산업 대표(CJ ENM 등)가 함께 초청된 구성 자체가, 이번 행사가 '작품'과 '산업' 두 층위를 동시에 겨냥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낙관만 하기는 이르다. 첫째, 이니셔티브의 구체적 집행 방식—어떤 프로젝트에, 어떤 기준으로, 누가 결정권을 갖고 투자할 것인지—가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정상 간 선언이 실제 펀드 조성과 프로젝트 집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국가 간 협력 사례는 드물지 않다.
둘째, AI가 창작과 유통에 미치는 영향, IP 보호 문제가 이번 서밋의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업계가 느끼는 위기감을 보여준다. 생성형 AI로 인한 저작권 분쟁, 배우·작가의 초상권 및 목소리 보호 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할리우드도 이미 파업으로 홍역을 치른 사안이다. 투자 확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과제가 남아 있다.
셋째, 넷플릭스·디즈니 같은 글로벌 플랫폼과의 관계 재설정이 필요하다. 이번 서밋에 이들 기업의 최고위급이 대거 참석했다는 것은 협력의 신호이자 동시에, 이들이 여전히 유통망을 쥐고 있는 현실을 재확인시켜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이 '공급자'에서 '공동 설계자'로 위상을 바꾸려면, 이들 플랫폼과의 협상력을 별도로 키워야 한다.
뤼미에르 서밋 자체가 콘텐츠 시장의 판도를 당장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두 가지 점에서 이후 흐름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수 있다. 하나는 투자 이니셔티브가 실제로 몇 편의 공동제작, 몇 개의 펀드로 구체화되는지, 그 실행 속도다. 다른 하나는 이 서밋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매년 이어지는 정례 협의체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여부다. 다보스포럼이 경제 담론의 상설 플랫폼이 됐듯, 뤼미에르 서밋이 영상산업의 '다보스'로 자리매김한다면 그 상징성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결국 이번 서밋의 진짜 가치는 선언문의 문구가 아니라, 앞으로 1~2년 안에 어떤 구체적 프로젝트와 계약, 공동제작 사례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 결과에 따라 이번 행사는 'K콘텐츠가 세계 콘텐츠 산업의 설계자로 올라선 변곡점'으로 기록될 수도, 혹은 화려했던 사진 한 장으로 남을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