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시에스타’ 두 개의 의미
  • 장기영 작가
  • 등록 2025-06-02 00:34:42
  • 수정 2025-06-02 09:41:20
기사수정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화요일의 시에스타'
  •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인용부호를 제외하고서라도 최소한 두 종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문학에서 서술이나 대화속에 녹아드는 상징적 의미는 고전적인 명제이다. 그런 상징적 의미는 짧은 단어에서부터 긴 문장에 이르기까지 언제 어디서나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독자에게 간단하고 단순한 지적 즐거움을 주는 것에서부터 지대한 사상적 문제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효과를 갖는다.


바흐찐은 이를 두고 서사체에서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인용부호를 제외하고서라도 최소한 두 종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부스는 이를 소통이론으로 압축하기도 한다. 소통이론은 작가가 산출해낸 숱한 상징과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혹은 작가의 손에서 벗어난 문제들을 다루는 중요한 이론 모델이기도 하지만, 사실 문학속에 깃든 함축적 의미를 추적해내는 여러 길 중의 하나이다. 


그만큼 상징적, 함축적 의미는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낳는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토지를 생산해내면서 “내 손으로부터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인물을 발견하곤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의 작품이 사회나 각 개인들에게 부과하는 짐들은 작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작가의 손에서 떠나버리는 순간 다종다양한 반응과 사건을 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한때 조정래는 태백산맥 때문에 우익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최근 귄터그라스의 신작 [광야]를 둘러싼 독일문단의 소란스러움도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바로 문학의 상징적/함축적 효과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영화의 하위 장르로 변해가는 미국대중소설류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지만, 가끔 영화에서도 이런 효과를 만날 수도 있다. 상징적 효과를 가장 적절하게 하는게 바로 기의와 기표이다.   


“마르께스의 예술은 단순한 데 그 특성이 있다. 그가 창안한 마술적 사실주의 혹은 신비적 사실주의가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매일 매일의 생활 혹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역사성과 토속신화나 전설과 같은 환상적 요소를 혼합하여 간단하고도 쉬운 문장으로 사건의 상황이나 움직임만을, 분석이나 설명함이 없이 붓 가는 대로 서술해 놓는 것이다. 마르께스는 대중적인 이야기거리를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소설 형태로 성공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작가이다. 그의 이러한 작품경향을 좀더 쉽게 말한다면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가 가장 비근한 예가 되겠다. 그래서 마르께스의 작품에서는 의식의 흐름과 같은 난해한 기교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해설은 민음사판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한 교수가 해놓은 것인데, 아마 마르께스를 가장 적절하지 못한 해설중의 하나라고 본다.

  

마르께스의 일련의 단편들과 장편(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서)에선 보르헤스 이상으로 풍자와 상징이 번득인다. 비교를 하자면 최근 기억되는 소설 중에 상징성이 강하다는 작품들-줄리안 반즈가 쓴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나 파트릭 사무아조가 쓴 <텍사코>를 보면 마르께스가 구축하고 있는 함축의 세계는 놀랄만큼 뛰어난 미학과 정신을 가지고 있다. 


<화요일의 시에스타>는 매우 간결한 단편이다. 200자 원고지로 겨우 40여쪽에 불과하다. 그러나 40여쪽에 불과한 지면에 담아내는 내용은 단단한 화강암 만큼이나 꽉 짜여있다. 적은 분량의 단편이 어떻게 해서 이런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는가. 그 해답은 바로 ‘시에스타’라는 1차적 의미와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2차적 의미가 주는 상징과 함축때문이다. 시에스타, 이 말은 중남미에서 ‘낮잠 자는 시간’을 의미한다. 너무 덥기 때문에 생겨난 습관인데 마르께스는 이런 습관을 중남미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만약 이 단편에서 시에스타가 단편적이거나 단순히 1차적 의미로만 해석될 수 있도록 했다면 평범한 단편에 그쳤을 것이다. 



본문①

적적한 삼등차간에는 숭객이라곤 그들 뿐이었다. 기관차의 연기가 계속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소녀는 자리를 떠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짐을 내려놓았다. 먹을 것과 신문에 싼 꽃다발이 들어 있는 플라스틱 자루였다. 소녀는 어머니를 마주보며 창가에서 떨어진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모두 수수하고 빈약한 喪服을 입고 있었다.


본문②

정거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리 저편 편도나무의 그늘이 진 보도 위에 오직 당구장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시가는 무더위 속에 둥둥 떠 있었다. 여인과 소녀는 기차를 내려 인적 없는 정거장-타일 사이사이로 난 풀 때문에 타일은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을 횡단하여 거리의 음지 쪽으로 건너갔다. 거의 두시였다. 그 시각엔 졸리움에 눌리어 시가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상점.관공서.공립학교는 열한시에 문을 닫았고 네시 직전에야 다시 열었다. 네시는 기차가 돌아가는 시각이었다. 정거장건너편에 있는 술집과 당구장이 달려 있는 호텔과 광장 한쪽에 있는  전신전화국만이 문을 열고 있었다. 바나나 회사를 모델로 한 것이 대부분인 집들은 문을 안쪽에서부터 잠그고 휘장을 내려놓았다. 어떤 집에서는 너무 무더워서 거기 사는 이들은 앞마당에 나와서 점심을 먹었다. 



본문 ①은 상복을 입은 두 모녀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두 모녀는 아들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그런데 본문②는 모녀의 애처로움과는 달리 찌는 더위를 피해 사는 ‘시에스타’의 정경을 답답할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런 대비되는 묘사는 ‘시에스타’를 함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본문②의 고딕체 강조부분은 더운 여름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사람들이 취하는 일상적인 태도의 한 면을 엿보게 한다.    



본문③

“신부님이 필요합니다.” 그녀가 말하였다.

“지금 주무십니다.”

“급한 일입니다.”하고 여인이 말했다. 

-중략-

“세시 후에 오라고 하시는데요.” 하고 몹시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는 바로 5분 전에 누우셨어요.”

“기차가 세시 반에 떠납니다.” 여인이 말하였다.



중남미 사람들에게 시에스타는 굳어진 습관이며 고쳐질 수 없는 것이다. 상복을 입고 찾아온 모녀를 신부의 여비서(여기서 여비서는 신부의 누이동생으로 나온다)는, 신부가 바로 5분 전에 잠들었다는 이유로 세 이후에 오라고 한다. 하지만 여인이 계속 강조를 하자 신부는 땀을 흘리며 나온다.  



본문④

“어떤 무덤을 찾아보려는 겁니까?”하고 그가 물었다.

“칼로스 센티노의 무덤입니다.”여인은 말했다.

“누구요?”

“칼로스 센티노.”하고 여인은 되풀이했다.

신부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는 지난 주일 이곳서 사살된 도둑입니다.” 하고 여인은 똑같은 어조로 말하였다.

“저는 그의 어머니입니다.”



상복을 입은 여인은 일주일 전에 사살된 도둑의 어머니이다. 화요일에 그것도 낮잠자는 시간에 아들의 무덤을 찾기 위해 신부를 찾아온 행위는 어떤 긴박함을 불러일으킨다. 그 긴박함은 다음 본문에 집약되어 있다.



본문⑤

지난주의 월요일 새벽 세시에 그곳 몇구획쯤 떨어진 곳에서 일은 벌어졌었다.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외로운 과부인 레베카는 이슬비 내리는 소리 사이로 밖에서 앞문을 부숴 열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시절 이후에 아무도 쏜 일이 없는 구식 연발권총을 골방에서 찾아내고 전등도 켜지 않은 채 거실로 갔다. 자물통에서 나는 소리보다도 이십 년의 고독에 의해 그녀 속에 발전해온 공포감에 따라 사태를 판단한 그녀는 상상 속에서 문이 있는 장소뿐 아니라 자물통의 정확한 높이를 겨냥하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무기를 꽉 잡고 두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가 총을 쏘아본 것은 그것이 난생 처음이었다. 발포 직후 아연칠을 한 지붕 위에서 내리는 이슬비 소리밖엔 들리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멘트 현관에서 둔탁한 금속성이 나더니 상냥하나 기진맥진한 낮은 목소리로 “아이구, 어머니.” 하는 소리가 났다. 



여기에서 레베카는 상복 입은 여인을 말한다. 어머니가 쓴 총에 아들이 맞아 죽었다. 아들은 도둑이고 어머니는 그 총으로 도둑을 쏘았다. 우리 정서로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것은 중남미의 현실이 되고 만다. 


도둑질을 허용하는 어머니

절도로 집안 생계를 책임지는 아들


중남미 대부분의 집들은 문을 안쪽에서 잠그고 휘장을 내린다. 이런 상황이 복합적으로 화요일 낮잠자는 시간을 뒤흔들어 놓는다. 낮잠자는 시간을 생각하면 길게 늘어지고 어딘가 느슨한 것을 연상케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복잡한 중남미 현실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절도는 궁핍한 현실을 겨우 모면하기 위한 생계이다. 권투를 하는 아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절도를 하고, 그것을 어머니가 허용을 하고.... 절도가 만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에스타 시간에도 빗장을 걸어 잠그고.... 절도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는 아들을 도둑으로 오인해서 총을 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그것은 곧 중남미 민중들의 현실이 읽혀진다.       



본문⑥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을 안하셨던가요?”

서명을 마치자 그녀는 말하였다.

“그는 아주 착한 아이였어요.”



신부는 처음 여인 쪽을 바라보고 이어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울려 하지 않음을 깨닫고 일종의 경건한 놀라움을 겪었다. 여인은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먹을 필요가 있는 물건을 훔치치 말라고 일렀어요. 그리고 그는 내 말을 따랐어요. 한편 그전 권투를 할 때에는 두들겨맞아 기진맥진해가지고는 사흘씩이나 누워 있곤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시에스타, 그것도 주말이나 혹은 공휴일이 아니라 화요일! 보통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길게 이어지는 낮잠자는 시간은 중남미의 찌든 더위를 연상케 한다. 그 시간대에는 모든 행정과 업무와 노동일이 중지된다. 하지만 그 시간대에도 빗장을 걸어잠그는 것은 절도나 강도를 막기 위한 자구책이다. 유일하게 그 시간대에 움직이는 것은 당구장이나 절도범들의 활동이다. 바로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절도범의 어머니(상복 입은 여인 레베카)가 처한 상황이 표면적인 시에스타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내용이다. 


  


0

프로필이미지

장기영 작가 다른 기사 보기

모티브온-300-180
이지메타 1면 배너 300-12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