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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와 그의 형제들은 여섯 개의 가야를 세운 후, 하나의 나라나 다름없는 연방을 결성한다. 맏이인 김수로는 형제들의 추대에 의해 초대 대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그가 다스리는 금관가야는 연방의 맹주 역할을 맡게 된다. 피를 나눈 여섯 시조의 단합으로 가야는 삼한지역의 강자로 부상하지만, 연방이 번성하고 부유해질수록 각 시조의 자손들 간에 질시와 배척이 시작된다.
시조들은 대가 거듭 바뀌어 피가 희석되면 반목이 더욱 심해질 것을 염려하여 논의 끝에 한 가지 고육책을 내놓는다. 연방의 대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여섯 형제의 피가 모두 섞인 사내아이로 한정하는 계승원칙을 만든 것인데, 이후 각 시조들은 이상적인 계승자를 얻기 위해 서로의 자식들을 의도적으로 복혼(複婚)시킨다.
그러나 어지러운 복혼의 결과는 예상치 못한 재앙으로 나타난다. 근친혼의 영향으로 손이 부쩍 귀해지고, 그나마 어렵게 얻은 아이들마저 남녀혼성의 기형적인 성징(性徵)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자, 연로해진 시조들은 대왕 위 계승원칙을 파기할 수 있는 조건부 수정안을 유지로 남긴 채 하나 둘씩 임종을 맞는다. 원칙에 부합되는 계승자가 나올 때까지 수로대왕의 적손(嫡孫)들로 하여금 한시적으로 섭정을 맡게 하는 절충안이었지만, 섭정이 네 번 바뀔 만큼 세월이 흘러도 가야의 진정한 대왕은 태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사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부심하던 가야의 사관들은 섭정 대왕들의 치세를 선황의 연호(年號) 기간에 산입함으로써 김수로는 158세가 되도록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이런 불안정한 섭정체제가 백 여 년 간 지속되면서 연방의 결속이 점차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갈 무렵, 원칙에 맞는 대왕 위 계승자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네 번째 섭정황제 뇌질가비(惱窒訶毗)가 그의 두 번째 아내 혜실에게서 여섯 시조의 피를 완성시킨 온전한 사내아이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십년 후, 평소부터 구설이 끊이지 않던 왕후 혜실이 서역에서 온 장사치와의 음행으로 화형을 당하게 되자, 태자의 출신과 소생에 대한 의혹이 가야 연방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된다. 더욱 태자 좌도기가 성장하면서 뇌질가비와 전혀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자, 좌도기의 대왕 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라는 중론은 점점 더 거세어진다.
결국 태자에 대한 탄핵 론까지 대두되며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지만, 좌도기를 자신의 친자로 믿고 싶어 하는 뇌질가비는 자신의 모든 힘과 권위를 동원하여 나라 안팎의 압력에 맞선다. 섭정대왕의 의지가 단호하다는 것을 확인한 금관가야의 조정에는 점차 태자를 옹호하는 세력이 늘어나게 되고, 반대로 좌도기를 탄핵하려는 세력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차츰 밀려나게 되면서 왕위계승 자격을 둘러싼 갈등은 불씨를 남긴 채 잠시 가라앉는다.
하지만 섭정대왕이 일흔 살이 되던 해, 세 번째 아내 옥지의 몸에서 그의 핏줄임이 분명한 또 다른 황자가 태어나자, 단호하기만 하던 뇌질가비의 의지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불안을 느낀 좌도기는 외종조부(外從 祖父)인 추사달과 함께 새로 태어난 왕자 미호(彌呼)를 제거하려 일을 꾸미지만, 엉뚱하게도 그의 모친인 옥지만 시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뇌질가비는 이때의 충격으로 반신불수가 된 채 자신의 침전에 유폐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정권을 장악한 좌도기와 추사달은 반대파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면서 조정의 요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 나간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정세역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반대파들은 둘째 왕자 미호를 태자로 추대하기로 결의하고, 그에게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부여할 묘책을 찾기 위해 부심한다. 미호 황자는 수로대왕과 그 형제들의 손에 있었다는 여섯 개의 별이 손금에 새겨져 있는 등 왕실의 적자라는 많은 징후들을 타고나긴 했지만, 선대의 기사(機事)인 남녀혼성의 성징이 발현되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거사계획을 세우고 있던 반대파들은 장차 미호 왕자에게 확정될 성(性)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왕실의 태의(太醫)인 한지를 자신들의 모임에 초빙한다. 한지는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온 철저한 의자였지만, 금관가야의 사직을 바로 세우려는 반대파들의 충정에 감복하여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세한다.
좌도기 태자를 폐위시키고 정권을 되찾으려는 모의가 무르익어 갈 때, 사로(斯盧, 신라의 옛 이름)의 속국인 음즙벌국(音汁伐國)에서 가야의 속국인 소라국(召羅國)의 영토를 침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가야연방이 사로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자, 사로는 음즙벌국이 침탈한 소라국의 영토를 즉각 복원시키는 한편, 가야연방의 맹주인 금관에는 변무사(辨誣使)를 보내온다. 사신들의 환영연이 벌어지는 날을 거사의 최적기라 판단한 반대파들은 태의 한지를 시켜 유폐되어 있는 섭정대왕에게 거사계획을 알리고 이를 승인하는 친서를 전해 받는다.
하지만 반대파들의 동향에서 모의의 징후를 감지한 좌도기와 추사달은 환영연의 경호를 자신들의 친위부대인 시오대로 교체하게 되고, 이에 불안을 느낀 반대파들은 거사를 밀어붙이자는 측과 미루자는 측으로 의견이 갈리게 된다. 치열한 논의 끝에 거사는 예정대로 강행하기로 결정이 났지만, 모임에 참여했던 사간(沙干) 지질치는 심한 두려움에 빠져 역모를 고변하기에 이른다. 거사가 틀어진 것을 알게 되자, 前 각간(角干) 도겸지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모두 자진들을 하게 되고, 태의 한지는 도겸지의 양자인 거질비와 함께 위험에 빠진 미호 황자를 구출하여 궐 밖으로 피신한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금관의 도성을 빠져나온 한지 일행은 섭정대왕 뇌질가비의 군공(君公)이자 오랜 친구인 아진도리 왕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가야연방의 최전선(最前線)인 성산으로 향하지만, 좌도기와 추사달의 체포 망이 전 가야연방으로 확대되어 운신이 어렵게 되자 결국 성산 행을 포기하고 만다. 고민 끝에 황자가 장성할 때까지 안전하게 피신해 있을 망명지로서 왜(倭)만한 곳이 없다고 판단한 일행은 가야와 왜 사이를 오가는 무역선에 숨어들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간다.
한지 일행이 처음 당도한 곳은 가야의 관부가 설치되어 있던 왜(倭)의 임나(任那)지역이었지만, 일행의 소재를 눈치 챈 좌도기와 추사달이 추포대를 보내오자 본주(本州) 섬으로 달아난다. 왜의 가장 큰 섬인 본주는 아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개한 땅이었지만, 그곳 주민들의 추대를 받아 마을의 수장이 된 한지 일행은 왜인들에게 가야의 앞선 문명과 문화를 전수해 줌으로써 그곳을 한결 개명된 땅으로 변화시킨다. 그러는 동안 주변의 왜인들은 한지 일행이 다스리는 땅으로 점점 더 많이 모여들게 되고 마침내 하나의 나라를 이룰 만큼 세력이 커지게 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결국 가냘픈 여인으로 성장한 미호는 왜에 최초의 나라를 세우고 여왕 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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