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를 통해 세계를 볼 수 있듯이 유럽연합을 통해 세계를 볼 수 있다. 필자가 유럽연합에 관해 강의할 때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를 인용하곤 하였다. 고 장영희 교수님의 번역이 마음에 와닿았다. 실제로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볼 수 있을까?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유럽연합은 하나의 세계이다. 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관계가 각 회원국의 대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때도 있었다. 유럽연합은 하나의 정치체로서 움직이기도 하고 회원국이 각각의 국가로 행동하기도 하면서 다른 나라와 협력하며 경쟁한다. 유럽연합 회원국의 정치제도와 상호 협력만이 아니라 유럽연합이 만드는 기준은 선도적으로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된다.
2025년은 한국과 유럽연합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지 15주년이 되는 해이다. 2023년 7월 24일 양측은 수교 60년을 맞았다. 양측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상호 관심과 이해의 수준이 높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연합 회원국에 대한 관심이 더 높다. 유럽연합에서 한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미국, 러시아, 중국과 일본에 미치지 못한다.
사실 유럽연합은 가까이 있다. 한국과 유럽연합은 1963년 수교 이래 정치, 경제, 안보 면에서 탄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양측은 많은 문제에서 사전에 조율하지 않아도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로 자연스러운 파트너이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의 지배, 인권 등 기본적인 가치를 공유하며 전략적인 국익이 서로 부합되는 부분이 많다.
2017년 2월 22일 도널드 투스크(Donald Tusk) 당시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필자의 신임장을 받으며 한국은 유럽연합의 “최고의 파트너”라고 말하였다. 한국은 유럽연합의 “최고의 파트너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고 “최고의 파트너”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유럽연합과 기본협정, FTA, 위기관리협정의 정무, 경제, 안보 면에서 3대 협정을 체결한 유일한 나라였다.
필자는 2017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유럽연합 주재 우리나라 대사로 근무하면서 투스크 상임의장의 평가에 근거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럽연합과 그 회원국은 한국에 대하여 호의와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한국은 유럽연합의 전략적 동반자 10개국 중에서도 ‘진정으로 뜻을 같이하는’(truly like-minded) 나라로 평가된다.
필자의 브뤼셀 근무가 결정되자 주한 유럽 대사들이 도움을 주었다. 유럽연합 조직도를 가지고 각 부서의 업무 및 회원국 간 관계를 설명해 주었다. 업무를 총괄하는 총국장은 물론, 최고 인사 비서실장을 만나라고 권유하였다. 식사를 함께 하라고 하면서 벨기에 음식은 “프랑스 음식인데 독일 음식만큼 많은 양”(French food with German portion)을 준다고 소개하였다. 음식을 소개하는 때도 유럽연합에서는 역시 프랑스와 독일이 전면에 나왔다.
브뤼셀은 단일도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사가 주재한다. 대사가 400명이 넘는다. 미국 대사만 3명이 주재한다. 유럽연합, 벨기에, 나토에 각각 대사가 주재한다.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도 같다.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브뤼셀에는 한국에 호감을 가지는 인사가 많았다. 한국에도 유럽연합에 대해 우호적 인식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만 직접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G7 정상회의가 2024년 6월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참석 정상이 7명이 아니라 9명이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하였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및 일본 정상이 관심을 받았다. 함께 한 EU 정상은 2명인 데다 명칭이나 역할도 생소하여 조연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언론 보도는 7명의 국가 정상에 집중되었다. 독자의 수요와 언론의 공급이 일치하였다.
유럽연합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하여도 미국, 중국이나 일본에 관한 강연 수요가 더 많다. 한 유럽대사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였다. 뱀에 관해 공부하였는데 코끼리에 관한 시험 문제가 나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코끼리는 거대한 동물인데 코가 길쭉한 것이 뱀을 연상시킨다고 하면서 뱀 이야기로 넘어가듯이, 무슨 주제로 시작하든 유럽연합으로 넘어가 이야기하라는 것이었다. 2022년 주한 외국 대사들 모임에서 Aris Vigants 주한 라트비아 대사가 필자에게 이야기한 내용이다.
유럽연합은 개인정보 보호부터 환경에 이르기까지 범세계적 기준을 선도한다. ‘브뤼셀 효과’(Brussels effect)이다. 유럽연합은 민주주의, 인권, 법의 지배 등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며 미국, 중국에 이은 세계 제3위 경제권으로서 영향력을 갖는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선도하는 G2, 어느 나라도 이끌지 못하는 G0(zero)만큼 유럽연합과 미국, 중국이 이끄는 G3 측면이 있다.
유럽연합이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도 있다. 브렉시트, 유로화 위기, 난민문제 등 도전을 맞을 때면 유럽연합이 해체될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었다. 유럽연합은 과거의 일이 되고 마는가? The European Union could soon be a thing of the past. 이러한 평가는 학자, 언론인 사이에서 빈번히 제기되어 왔다.
유럽연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전례 없는 거대한 실험이 되고 있는 만큼 ‘미지의 목적지로의 여행’(journey to an unknown destination)에 비유된다. Andrew Schofield, “Europe: Journey to an Unknown Destination: 1972”, The Reith Lectures, BBC, 1972.11.7.
유럽연합은 1953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 munity: ECSC)로 출범한 후 계속 진화하여 왔다.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해결을 가져와 유럽연합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마치 “우리를 죽일 수 없는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That which does not kill us, makes us stronger)라는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의 실증 사례와 같았다.
유럽인의 정체성도 확립되어 왔다. 유럽의회 행사에서 자신을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소개하지 않고 남부유럽 출신이라고 말한 인사를 보았다. 자신을 영국 출신이라고 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출신이라고 말한 인사와 대조를 이루었다. 유럽연합이 주권국가 간 국제기구 성격을 넘어 연방국가를 지향하는 모습과 일부 회원국 내 분리주의 동향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브뤼셀은 ‘호텔 캘리포니아’의 가사처럼 “체크아웃은 할 수 있어도 떠날 수는 없다”(You can check out but you cannot leave). ‘Hotel California’는 1976년 나온 가수 Eagles의 록 음악의 제목으로서 가사에 “You can check 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라는 구절이 있다.
유럽연합이 갖는 구심력이다. 필자도 유럽연합에 관해 강연할 때는 이 말을 인용하며 EU 회원국 27개국 중 26개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32개국 중 31개국을 방문하였다고 소개하고 사이프러스와 아이슬란드는 다시 유럽을 방문할 이유로 남겨두었다고 말하곤 한다.
이 책은 독자가 유럽연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기술하였다. 많은 분이 생각을 공유해 준 결과를 반영하였다. 코끼리를 만지며 이야기하는 것과 같을지 모르지만 필자가 경험한 유럽연합의 안팎을 소개해 보고자 하였다. 많은 분들이 유럽연합의 속사정을 설명해 주면서 필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기를 원하였다. 필자는 2022년 5월 공직에서 퇴직한 이후에도 유럽연합 및 회원국 인사와 어울릴 기회가 많아 계속 유럽연합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문제는 필자가 파악한 점들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5년 전에 초안을 쓰고 추가로 읽는 글과 만나게 되는 유럽인들의 설명을 토대로 수정하고 다듬기를 계속하였다. 유럽연합 관련 상황이 변화하여 수정이 필요한 사항이 계속 추가되지만 일단락을 짓기로 하였다. 책의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다.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아 정확을 기하였지만 남아 있는 어떠한 잘못도 필자의 책임이다. 유럽연합이 진화해 나가듯이 더 많은 공부와 경험을 통해 보완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2019년 12월 6일 대사관 동료들은 다음 날 브뤼셀을 떠나는 필자를 ‘테디 베어’(Teddy Bear)라고 부르며 환송해 주었다. 유럽의회 의원들이 우정을 담아 필자를 부르던 말이었다. 3년의 브뤼셀 근무는 국제정치를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쁨과 도와주는 분들에 대한 감사의 연속이었다. 우정과 생각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 많은 분께 감사한다. 대사관 동료, 현지의 교민 분들, EU와 나토 동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마음 깊은 곳의 이유이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항상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과 사랑을 남기고 소천하신 장인‧장모님, 아내와 아이들, 동생, 친구, 동료들에게 각별히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 2025년 5월 김형진
김형진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 객원연구원 겸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정책위원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대학교에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일본 도쿄대학 객원연구원, 와세다대학 초빙연구원으로 수학하였다.
2022년 5월 퇴직할 때까지 38년 넘게 정부에서 근무하며 국가안보실 제2차장, 서울시 국제관계대사, 주벨기에유럽연합 대사, 외교부 차관보,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외교비서관, 북미국장 등을 맡았고 6자회담, 4자회담, KEDO 협상 등에 참여하였다. 미국, 가나, 중국, 벨기에 등에서 근무하였다.
현재는 국내외 대학에서 강연을 진행하며, 국내외 학술지에 다양한 논문을 기고하고 있다.
박영사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