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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는 인간: 호모 에라티쿠스 Homo Erraticus
  • 김창민 간디서원
  • 등록 2025-06-05 08: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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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탄생 배경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을 계기로 저자는 2008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에 인문학 공통 교과목으로 <동서양 고전과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행복’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이 과목은 가칭 ‘행복학 연계 전공 과정’ 개설을 위한 탐색과목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동서양 문학과 철학, 종교학, 심리학, 뇌과학 등의 전공 교수들이 학제적 협동강의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그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각 학문 분야별로 행복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뒤 저자는 <서울대학교 인문학 최고위 과정>(AFP)에 지도교수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 경영대학과 행정대학원의 최고위 과정과 기업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같은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15년 이상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인간과 행복에 대해 고민하고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 인간과 삶의 근본에 관한 질문과, ‘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인가?’, ‘왜 인류는 환경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가?’ 등 현실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이 책에 담아 독자들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나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극복하는 AI시대 인생론


우리는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잘살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늘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그 질문 이면에는 허무주의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큰 과제 중 하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1위의 자살률을 기록하는 이유로는 지나친 경쟁과 황금만능주의가 초래하는 인간관계의 단절과 상대적 박탈감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삶에 대한 허무주의도 한몫을 차지한다. 현대 과학이 이룬 성과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허무주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비과학적 이해에서 비롯된다. 세계와 나, 나와 타인을 분리해서 인식하고, 나를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로 인식하고, 타인을 오로지 대립과 경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서구의 개인주의가 초래한 잘못된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사실, 인간의 몸은 100조 마리 이상의 미생물과 함께 사는 하나의 공생체이고, 나와 세계, 나와 타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한 몸이듯이, 나와 환경, 나와 자연은 분리 불가능한 한 몸인 것을 현대 과학은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은 천문학, 진화생물학, 뇌과학 등 현대 과학의 성과와 문학, 철학, 심리학 등 인문학의 지혜를 종횡으로 엮어낸 ‘인간 설명서’이자 ‘인생 지침서’이다. 오늘날 인류와 지구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서구의 개인주의가 낳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를 극복하고,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AI 시대를 대비하는 대안적 인생론이다.


지구는 우주 속의 먼지

-그 속의 인간은 찰나를 살다가는 우주적 존재


내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행성이다. 지구 생태계의 생명줄인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1억 5천만km, KTX를 타고 시속 300km로 달려가면 태양에 도달하는 데 꼬박 57년이 걸린다. 우리가 맑은 날 밤하늘을 쳐다볼 때 하늘 가운데 뿌옇게 연한 구름 띠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우리 은하계다. 우리 은하계는 태양 같은 별 1,000~2,000억 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우리 은하계의 길이는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 도는 빛의 속도로 12만 년을 가야 하는 거리이다. 폭은 3만 광년, 높이는 1,000광년이다. 그런데 우주에는 우리 은하계와 같은 은하계가 2,000억 개 이상 있다고 한다. 우리 은하계와 가장 가까운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인데, 거기까지 거리는 250만 광년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광대한 공간이다. 만약 이 우주를 지구 크기로 줄인다면, 지구는 모래알 정도 될까 말까 할 것이다. 그 모래알만 한 지구 속에서 나의 존재는 어떠할까? 먼지도 안된다. 

그러면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현 천문학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약 137억 년으로,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 년으로 추정된다.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이라는 사실 역시 실감이 나지 않기에, 비유적 설명을 해보자.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 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농업의 시작은 약 1만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같은 고대 문명의 시작은 약 5,000년 전으로 본다. 산업혁명은 불과 250년 전의 일이다. 45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를 24시간 하루로 비유해 보면, 지구의 형성을 자정(00:00)이라고 할 때 첫 생명체의 등장은 오전 5시(약 35억 년 전)이고, 산소의 대량 생성(산소 혁명)은 오전 11시경(약 24억 년 전), 다세포 생물의 등장은 오후 8시 48분경 (약 6억 년 전), 공룡의 등장은 오후 10시 45분(약 2억 3천만 년 전), 공룡의 멸종은 밤 11시 39분(약 6천 6백만 년 전), 현생인류의 등장은 밤 11시 59분 54.24초(5.76초 전, 약 30만 년 전), 농업의 시작은 밤 11시 59분 59.808초(0.192초 전, 약 1만 년 전), 산업혁명은 밤 11시 59분 59.995초(0.005초 전, 약 250년 전)이다. 지구의 긴 역사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짧은가? 게다가 한 인간의 평균 수명을 100년으로 본다고 해도, 지구의 나이를 24시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0.0019초 살다 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루살이의 삶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찰나를 살다 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채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인간은 공생체


137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했다. 이 우주의 역사에서 복잡한 생성,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지구가 탄생한 것이 45억 년 전이고, 그 지구 안에서 또 수십억 년 복잡한 진화 속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또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 동안 복잡한 필연과 우연의 결과로 인류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탄생한 인간이 바로 오늘의 나인 것이다. 고로 나는 137억 년에 걸쳐서 우주가 관여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고의 세월을 보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인 나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인간 말고도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한다. 그들 또한 수많은 인연의 결과로 미미한 확률을 극복하고 이 땅에 생명을 받아 태어났다. 그들이 인간보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코끼리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동료들과 소통을 하고, 맹금류의 시력은 인간의 몇 배에 달하며, 심지어 나무는 빛, 바람, 수분, 냄새, 거리, 방향, 여러 가지 대지의 영양소 등을 감지할 수 있는 등 인간의 감각 능력에는 없는 15가지 다른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최근 밝혀졌다. 인간이 감각기관의 능력 한도 내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다른 동식물들 또한 그들이 지닌 감각 능력을 바탕으로 수집 가능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세상을 구성하고 그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사실상 인간이나 곤충이나 큰 차이가 없다. 

실제 최근의 과학적 성과, 특히 미생물학의 발견에 따르면, 우리 인체는 270가지 종류의 세포 약 100조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인체 속에는 4천에서 1만 종류 이상의 미생물이 150~500조 개가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몸에는 세포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미생물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개별 생명체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 특히 박테리아와 한 덩어리로 된 공생명체이다. 우리 몸은 수많은 생명체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공생체인 것이다.


중층적 복잡계 속에서 끝없이 변해가는 생명체


앞서 인간은 우주와 지구의 역사가 만든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생명 활동 중인 공생체임을 확인했다. 내가 곧 우주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재하는 고정된 존재라기보다는 끝없는 변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생명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상과 우리의 마음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인간은 각자 마음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고, 상황이 변하면 우리의 마음도 변한다. 이렇게 보면 마음과 세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슬프면 세상이 칙칙하고 우울한 곳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행복하면 같은 주변 환경이 생기와 색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 인간은 자연과 사회와 문화라는 중층적인 복잡계 속에서 끝없는 변화의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중층적 복잡계 속에서 끝없이 변해가는 생명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총합이다. 그 환경은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 등 사회환경과, 역사, 가치, 전통 등 문화환경을 포함한다. 이것들이 바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과 지각조차도 문화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색깔, 소리, 냄새, 맛 등에 대한 인식과 분별은 절대적으로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을 가끔씩 해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영생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 유치원을 10년을 다니든, 100년을 다니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을 받는 기간이 5000년이든 만 년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천만번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룻밤에 소주를 백 병 마셔도 되고, 피자를 백 판 먹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음식이 맛있게 느껴질까? 모든 음식이 지겨워질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소중한 사람도 없어진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고, 무한히 만날 수 있으니까. 오늘 뭔가를 하든 말든 아무 의미가 없다. 오늘 못 한 것이 있으면 다음에 십만 번이든 백만 번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만이니까.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진다. 영생이 이런 것이라면 그래도 영생하고 싶을까? 

우리 인간의 삶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유한하고, 유일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의미 있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적 시간 속에서 바라볼 때, 인간은 섬광처럼 짧은 세월을 살다 가기에 그 삶은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게다가,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지만 우주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고, 이 우주에 어떤 의미를 새겨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우리의 삶은 기적 중의 기적인 것이다. 더구나 나는 우주에 생명을 요청한 적도 없고, 우주 또한 조건 없이 나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가! 어찌 보면 우주가 나에게 백지수표를 주고 최장 100년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쓰라고 허락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구 사상의 문제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큰 과제 중 하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된 주된 이유로는 지나친 경쟁과 황금만능주의가 낳은 상대적 상실감과 박탈감을 꼽을 수 있지만, 삶에 대한 허무주의도 한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허무주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고 있다. 세계와 나, 나와 타인을 분리해서 바라볼 뿐 아니라, 대립과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서구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니체를 비롯해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허무주의로 쉽게 빠졌던 이유는 세계와 나를 분리해서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의 자아 인식이나 세계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났다고 하는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난 존재다. 나와 세계에 고정된 본질적 의미는 없다고 여기는 실존주의가 허무주의로 흐르기 쉬운 것은 자아를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세계에 대립되는 독립된 개체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비과학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사실 인간의 몸은 100조 마리 이상의 미생물과 함께 사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이고, 나와 세계, 나와 타자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서 어머니와 나는 한 몸이듯이, 나와 환경, 나와 자연은 분리 불가능한 한 몸인 것이다. 이를 현대 과학은 입증하고 있다.

이렇게 나와 자연, 나와 세계를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로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중심주의와 개인주의가 초래한 무한경쟁과 물질만능주의, 환경 파괴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계라는 이 거대한 생명 네트워크가 나를 만들었고, 내가 곧 이 지구라는 생명 네트워크의 일부라는 과학적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과 행동, 그리고 세계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지혜로운 삶을 위한 10가지 사고 습관 


1. 협소하고 왜곡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라.

애초 나의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45억 년 전, 지구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몸 세포보다 많은 100조 마리 이상의 미생물들과 함께 살고 있는 공생명체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의 총합이다. 그 환경은 자연환경만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 등 사회환경과 역사, 가치, 전통 등 문화환경을 포함한다. 이것들이 바로 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나의 환경을 분리하는 개인주의에서 초래되는 협소하고 왜곡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라.


2. 세계는 감각과 지각이 만든 허상이다.

 대부분 사람은, 실재하는 세계가 있고 자기는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태어나서 오감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한정된 능력을 지닌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받아들인 제한된 정보를 뇌에서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한 세계이며,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식대로 해석해서 구성한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로 존재하는 세계는 없다. 게다가 우리의 감각과 지각은 문화의 산물이며, 색깔, 소리, 냄새, 맛 등에 대한 인식과 분별은 언어와 문화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3. 모든 분별은 상대적이다. 

길다, 짧다, 크다, 작다는 것에서부터 동서남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분별은 상대적이다. 20세기 초까지도 중국에서는 전족을 한 여인을 아름답다고 여겼듯, 미의 기준도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자라온 문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분별한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의 감각’, ‘나의 감정’, ‘나의 사고’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4. 나의 욕망도 사회와 문화가 만든다.

인간의 가장 주된 욕망은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는 인간을 만든다. 그래서 사회가 변화하면 개인의 욕망도 변한다. 내 욕망이 나의 필요에 따른 것인지 남의 욕망을 모방(모방 욕망)하는 것인지 분별하는 태도를 가지면 쉽게 욕망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5. 일어나는 감정을 한 발 떨어져 관찰하라.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은 분노, 시기, 질투 등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한 발 떨어져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자기 반성적 사고 능력이다. 이 세상과 타인은 내 마음대로 쉽게 바꿀 수 없지만, 나의 마음을 잘 다스림으로써 우리는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동서양의 수많은 현자와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6. 세상의 잣대에 얽매이지 마라.

인간의 삶의 방식과 환경은 계속 변해간다. 그래서 가족, 사회, 국가, 돈, 명예, 지위, 일, 여가, 우정, 사랑 등 모든 가치는 세월과 함께 변해간다. 어느 시대, 어떤 문화 속에서 다수가 따르는 잣대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늘날 추구하고 있는 가치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늘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설정하고 추구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7. 열정적으로 살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머릿속에 아무리 깊은 지식과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해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삶의 과정, 삶의 궤적이 나인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생명을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열심히 불태워야 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을 모르는 데서 오는 과욕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지구, 국가, 사회, 문화 등은 모두 서로가 얽히고설킨 복잡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8. 함께하는 자가 행복하다.

심리 연구에 따르면, 좋은 감정은 금방 사라진다. 그래서 행복학에서는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느끼고, 좋은 감정을 많이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반드시 명심할 것은, 나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것이 더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행복의 기술이다. 왜냐면, 우리가 사회적 동물로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9. 늘 죽음을 의식하라.

인간이 죽지 않고 영생하는 존재라면, 지금 안 해도 언젠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할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인간은 길어야 백 년 정도밖에 못 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죽음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죽음은 공생명체인 내 몸의 형체가 대지와 허공 속으로 다시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애초에 바다의 일부였던 파도가 파도의 모습을 거두고 바다 그 자체가 되는 것, 구름이 구름 모습을 거두고 다시 공기와 빗물로 변하는 것, 빗물이 냇물이 되고, 냇물이 강물이 되고, 강물이 바다가 되는 것처럼. 


10. 나와 우주의 의미는 내가 만든다.

지구라는 행성은 광대한 우주에서는 먼지와 다름없다. 그 먼지 속에서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인간으로 내가 살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 중의 기적이다. 우주의 시공간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이지만 수천억 개의 은하계를 상상할 수 있고,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는 백지 같은 우주에 사랑과 우정, 연대와 희생이라는 고귀한 의미를 새겨 갈 수 있는 인간은 거룩한 존재이다. 이 우주에 어떤 의미를 새겨 넣을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나와 우주의 의미는 내 손에 달려있다.


김창민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와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대학교에서 중남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어서문학과 교수,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공저로는 『차이를 넘어 공존으로: 스페인어권 세계의 문화 읽기』, 『트랜스 라틴: 근대성을 넘어 탈식민성으로』, 『스페인 문화 순례: 세빌야에서 산티아고까지』, 『스페인어권 명작의 이해』 등이 있다.

대표 역서로는 『미국은 섹스를 한다』(Diana, la cazadora solitaria),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I, II』(Don Juan Manuel), 『여우가 늑대를 만났을 때 I, II』(Mujeres de ojos grandes),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La oveja negra y otros cuentos), 『살라미나의 병사들』(Soldados de Salamina), 『멕시코의 역사』(Nueva historia mínima de México) 등이 있다. 

우리 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작품으로는 Poemas de Chunsu Kim (『김춘수 시선』), Retorno al cielo (천상병의 『귀천』), Mitos coreanos (『한국의 신화』), Sueños del barranco (오세영의 『벼랑의 꿈』), Mandala (김성동의 『만다라』)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최고지도자과정(AFP)의 심화과정 지도교수를 맡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 공기업 고급경영자과정, 행정대학원 공공리더쉽과정, 세종연구소 국가전략 연수과정을 비롯해 지자체, 기업 등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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