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키산맥 위로 노란 경비행기 한 대가 난다. 조종석에는 남자가 있고, 옆자리에는 개가 앉아 있다. 아래로는 텅 빈 고속도로와 뒤집힌 차들이 지나간다. 사람은 없다. 바람 소리와 엔진 소리뿐이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처음 보는 장면인데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느낌이 따라붙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더 독 스타즈〉는 그런 영화다.
배경은 바이러스가 인류 대부분을 쓸어간 뒤의 미국 콜로라도다. 피터 헬러의 2012년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각본은 〈레버넌트〉의 마크 L. 스미스가 썼다.
주인공 히그(제이콥 엘로디)는 아내를 잃은 정비사이자 조종사다. 버려진 비행장에서 개 재스퍼와 함께 산다. 곁에는 전직 군인 뱅리(조시 브롤린)가 있다. 그는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부르고 무기고를 채우는 데 공을 들인다.
히그는 경비행기로 폐허가 된 덴버를 오간다. 약을 구해 메노나이트 공동체에 건네고, 아내와 살던 집에 들러 추억에 잠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랜드정크션 쪽에서 흘러나오는 무전 신호를 듣는다. 살아남은 누군가가 있다. 그는 떠나기로 한다.
고립과 공동체. 총과 희망. 머무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뼈대는 분명하다. 한 관객은 이 영화를 한 줄로 정리했다. "레퍼런스들로 이어붙인 누더기 아포칼립스." 날이 선 말이다. 하지만 비슷한 말을 하는 관객이 많다.
장면마다 다른 영화가 겹친다. 남자와 개가 텅 빈 도시를 누비는 모습은 〈나는 전설이다〉다. 잃어버린 가족을 품고 걷는 남자는 〈더 로드〉다. 문신투성이 약탈자 무리는 〈매드맥스〉다. 공동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라스트 오브 어스〉다. 목장을 지키는 총잡이들과 지평선 너머의 무리는 존 웨인의 서부극이다.
한 관객의 말이 가장 정확하다. "비디오게임에서 수도 없이 플레이해본 느낌이 드는 영화." 폐허 속 약국을 뒤지고, 잠긴 문 열쇠를 찾고, 약탈자를 피해 숨는다. 익숙한 퀘스트다.
장르는 원래 반복으로 굴러간다. 반복이 죄는 아니다. 〈더 로드〉는 같은 폐허에 부자의 대화를 얹었다. 〈칠드런 오브 맨〉은 같은 절망에 아이 울음소리 하나를 얹었다. 그 하나가 영화를 남게 만든다. 이 영화가 얹은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은 뜻밖에도 악당 쪽에서 드러난다.
영화에는 '리퍼스'라는 약탈자 무리가 나온다. 덴버를 휩쓸고 다니는 문신투성이 패거리다. 그런데 이들은 원작에 없다.
한 리뷰어는 이 점을 짚는다. 헬러의 원작은 코맥 매카시를 닮은 조용한 소설이다. 충돌 장면에 나오는 적은 많아야 아홉 명 남짓이다. 영화는 큰 액션 장면을 위해 대규모 무리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리를 세계 안에 어떻게 놓을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연성이 무너진다. 인류 대부분이 사라진 세상이다. 히그는 몇 년을 날아다녀도 사람 하나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모였는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위해 몰려다니는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할 때 나타나고, 필요한 만큼 쓰러진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그리는 방식이다. 이름이 없다. 얼굴이 없다. 말도 없다. 함성과 고함만 있다. 로저이버트닷컴의 로버트 다니엘스는 이 장면들이 옛 서부극에서 백인 정착촌을 습격하는 원주민을 그리던 화면과 소리를 그대로 빌렸다고 지적한다. 다른 리뷰어도 존 웨인 영화 속 원주민 묘사와 거의 같다고 했다.
이것이 대상화다. 리퍼스는 사람이 아니다. 쓰러뜨려야 할 과녁이다. 다니엘스의 말대로 그저 쌓이는 몸뚱이다. 브롤린이 홀로 무리를 쓸어버리는 장면도 통쾌하지 않다. 쓰러지는 쪽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녁이 쓰러질 때 관객은 슬프지 않다. 사람이 쓰러질 때 비로소 마음이 흔들린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소설 〈나는 전설이다〉다. 남자 하나가 텅 빈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설정은 〈더 독 스타즈〉와 닮았다. 그러나 '적'을 대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소설 속 벤 코트만은 이름 없는 괴물이 아니다. 종말 전에는 주인공 로버트 네빌의 이웃이자 친구였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이던 두 사람이 재앙 이후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진다. 밤마다 집 앞에서 네빌의 이름을 부르는 괴물. 그 괴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과거가 있고, 함께한 기억이 있다.
소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감염자들은 자기들만의 새 사회를 꾸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네빌은 낮마다 동족을 죽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다. 네빌은 마지막에 깨닫는다. 정상이란 다수의 기준이라는 것을. 이제 괴물은 자신이라는 것을. 흡혈귀가 옛 인류의 전설이었듯, 그는 새 인류의 공포스러운 전설이 된다.
시선의 뒤집기다. 적의 자리에 서보는 순간, 이야기는 생존극에서 차원이 다른 이야기의 힘을 얻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70년이 지나도 힘을 잃지 않는다.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고, 수많은 좀비 영화의 뿌리가 됐다.
2007년 프랜시스 로런스의 영화도 이 질문을 붙잡으려 애썼다. 극장판에서 네빌은 백신을 남기고 자폭하는 영웅이 된다. 반면 감독판에서는 감염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납치된 짝을 되찾으려 한다. 네빌은 그 짝을 돌려준다. 그 순간 둘은 서로를 존재로 인정하고, 무리는 조용히 물러난다. 원작에 견주면 아쉽지만, 적에게 얼굴을 돌려주려 한 시도였다.
〈더 독 스타즈〉에는 그런 고민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출발점에서 같은 질문을 쥐고 있었다. 뱅리는 외부인을 '바퀴벌레'라 부른다. 히그는 그 시선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찾아 떠난다.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전설이다〉가 던진 바로 그 질문이다.
그런데 리퍼스가 등장하는 순간 답은 정해진다. 바깥 사람들은 정말로 바퀴벌레였다. 뱅리가 옳았다. 영화는 배척을 비판하려다 배척을 정당화하는 화면을 만들었다. 다니엘스가 짚었듯, 타자에 대한 경계를 묻던 영화가 스스로 타자를 가장 낡은 방식으로 그린 셈이다.
다니엘스는 또 하나를 덧붙인다. 이 영화의 종말 이후 세계에는 유색인종이 거의 없다. 마지막에 손을 내미는 공동체도 대체로 백인이고 종교적이다. 그 자체가 큰 결함은 아닐 수 있다. 다만 리퍼스를 그리는 방식과 겹치면서 영화의 시선이 더 도드라진다.
대상화의 대가는 감동이다. 〈나는 전설이다〉의 마지막이 아픈 이유는 네빌이 적을 이해하는 순간과 자신이 몰락하는 순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 오히려 담담해진다. 독자는 그 담담함 앞에서 오래 머문다.
〈더 독 스타즈〉의 히그는 공동체를 향해 날아간다.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런데 그 희망은 누구와 함께하는 희망인가. 우리 편으로 분류된 사람들만의 희망이다. 바깥은 여전히 쓸어버려야 할 무리로 남는다. 경계선은 그대로이고, 히그는 그 안쪽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인물들도 같은 문제를 앓는다. 히그가 아내를 어떻게 만났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다니엘스는 두 주인공이 잃은 배우자 이야기보다 팝스가 기억하는 팬케이크 이야기를 더 많이 듣게 된다고 꼬집었다. 적에게 얼굴이 없듯, 주인공의 슬픔에도 얼굴이 없다.
기시감은 감독에게서도 온다. 〈에이리언〉과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까지. 한 시대의 이미지를 만든 경이로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 그런데 이번 작품에 기대와 실망이 교차된다.
IMDb의 한 리뷰는 이 영화가 아주 유능하다고 했다. 풍경은 아름답고 세계는 잘 돌아간다. 촬영감독 에리크 메서슈미트가 담은 비행 장면은 거의 모든 리뷰가 인정한다. 한 관객은 당장 경비행기 면허를 따고 싶어졌다고 했다. 다른 관객은 종말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보다 어떻게 살 것이냐를 묻는 영화라 했다. 누군가에게는 빈약함이고, 누군가에게는 평온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