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동맹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고, 동맹을 믿지도 않았다

아모스 기자

등록 2026-09-30 21:28

AI생성 이미지=제미나이


KBS2 대하드라마 〈문무〉의 1차 티저는 개기일식이 드리운 전장에서 시작한다. 문무왕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의 실체는 의외로 희미하다. "삼국통일을 이룬 왕", "동해의 용이 된 왕"이라는 두 문장으로 흔히 요약된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에게 열전이 아닌 본기 두 권(권6과 권7)을 통째로 할애했다. 신라 왕 56명 가운데 유일한 사례다. 기록이 그만큼 많다는 것은 그의 시대가 그만큼 복잡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드라마 방영을 앞둔 지금, 이 복잡한 인물을 다시 읽기에 좋은 때다. 이 글은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질문이 무엇인지 짚어 본다.


침을 뱉은 청년, 그리고 20년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서른다섯 살의 태자 김법민은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어, 나는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았다. 오늘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다. 부여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백 년 왕조사를 정제된 한문으로 기록한 책에서 이 대목만은 유독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로 들린다. 그가 말한 누이는 고타소다. 642년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 남편 김품석과 함께 죽었고, 시신은 감옥 바닥에 묻히는 모욕까지 당했다. 당시 법민은 열일곱 살쯤이었다. 아버지 김춘추는 딸의 부고를 듣고 기둥에 기대선 채 종일 눈앞을 지나가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장면을 개인적 복수극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김춘추가 고구려와 왜, 당을 오가며 벌인 외교는 딸과 사위를 잃은 복수심에서 출발했을지 몰라도, 그 이상으로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당시 김춘추는 비담과 알천으로 대표되는 반대 세력과 경쟁하는 처지였고, 대야성의 참패는 그에게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러니 신라의 대외 전략에는 처음부터 원한과 계산이 함께 있었다.


문무왕의 삶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원한을 평생 정책의 동력으로 삼되 정책 자체는 감정에 맡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비성에서 침을 뱉던 청년은 이후 20년 동안 놀라울 만큼 차갑게 계산하는 군주가 된다. 감정이 뜨거운 사람이 판단은 차가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드라마 인물 김법민의 핵심 과제일 것이다.


동맹이라는 이름의 위험


나당동맹은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선택이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시달리던 신라로서는 당나라라는 거대한 힘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대가는 이후 문무왕이 치렀다.


당은 백제를 무너뜨린 뒤 약속과 달리 백제 땅에 다섯 개 도독부를 설치했다. 663년에는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문무왕을 그 대도독에 임명했다. 665년에는 취리산에서 문무왕과 부여융을 마주 세워 화친을 맹세하게 했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왕자를 웅진도독으로 앉히고 신라 왕과 동격의 맹약 상대로 삼은 것이니, 당이 신라를 동맹국이 아니라 자기 행정구역의 하나로 취급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문무왕이 이 모욕 앞에서 곧바로 맞서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시 신라는 당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백제부흥군과 고구려, 왜라는 공동의 적이 살아 있었다. 그는 대도독 직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당의 요구에 따라 출병한 백제부흥군 진압 과정에서 신라군을 독자적으로 운용해 점령지를 실질적으로 신라 영토로 편입해 나갔다. 당이 5개 도독부를 웅진도독부 하나로 줄여야 했던 것도, 백제 유민의 반감이 신라가 아닌 당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싸울 준비를 했다. 660년대 초부터 구진천 등에게 무기 개발을 맡겼고, 669년에는 전국 174개 목장을 관청과 김유신 같은 주요 귀족에게 재분배해 기병 전력을 키웠다. 당의 신라 침공 의도가 노골화되기 전에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맹에 대한 하나의 교훈을 읽을 수 있다. 문무왕은 동맹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고, 동맹을 믿지도 않았다. 동맹을 이용하되 그 동맹이 언제든 적대로 바뀔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 전환의 순간을 위해 조용히 힘을 길렀다. 동맹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동맹국의 이익과 나의 이익이 겹치는 구간이 끝나는 지점을 미리 계산해 두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그의 행보는 보여 준다.


이기는 법보다 지지 않는 법


문무왕의 전쟁 운영은 화려한 승전보보다 절제로 기억할 만하다. 그의 전략을 관통하는 것은 "누구를 적으로 돌리고, 누구를 곁에 둘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었다.


고구려 원정이 그렇다. 662년 평양성을 공격하다 고전하던 소정방에게는 군량을 수송해 주었지만, 668년의 고구려 정벌에서도 신라는 백제 때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군을 투입했으나 이미 연남생의 투항으로 내부가 무너진 고구려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는 소극성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당과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는데 고구려 정벌에 힘을 소진하면 이후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어지고, 고구려인의 원한도 과도하게 사게 된다. 문무왕은 힘을 아꼈다.


이 계산은 나당전쟁에서 결실을 맺는다. 670년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오늘날의 익산 일대)에 머물게 한 것은, 고구려 유민을 당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는 정치적 장치였다. 책문에서 그는 안승의 조상 중모왕(주몽)의 공덕을 기리고 "영원히 이웃나라로서 형제처럼 지내자"고 말한다. 자신이 멸망시킨 나라의 후손에게 왕의 지위를 인정해 준 것이다. 이후 안승은 보덕왕으로 격상되었고, 문무왕은 자신의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고구려 유민을 이용 대상으로만 다루지 않고 신라의 울타리 안에 정치적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였다.


군사적 경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당전쟁 초반 신라는 승승장구했으나 석문 전투 등에서 큰 패배를 당해 수세에 몰렸다. 김유신이 673년 세상을 떠나자 장수들이 줄줄이 사직을 청했고, 처자식을 데리고 당으로 달아나려는 귀족까지 나왔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가 무너지는 예는 역사에 흔하다. 그러나 675년 매소성에서 이근행의 대군을 격퇴하고, 676년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물렸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외교적 출구도 함께 열어 두었다는 사실이다. 전쟁 중에도 신라는 당에 사죄사와 조공사를 보내고 토산물을 바쳤다. 싸우면서 화해의 문을 닫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버티고 외교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유지해, 당이 전면 재침을 감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중 전략이었다. 후대가 "화전양면전술의 달인"이라고 평한 이유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힘으로만 상대하지 않은 것이다.


통일의 두 얼굴


문무왕을 다루는 글은 흔히 여기서 찬사로 끝난다. 하지만 그의 통일에는 그림자도 있고, 그 그림자를 함께 봐야 인물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우선 통일의 범위다. 신라가 최종적으로 장악한 영역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이었다.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 곧 만주와 요동은 신라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통일신라"라는 호칭 자체가 논쟁거리다. 고구려 북부를 계승한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로 부르자는 견해가 있고, 신라가 이룬 것은 삼국 전체의 통합이라기보다 한반도 중남부의 통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반대로 당의 한반도 지배 의도를 좌절시키고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하나의 국가 체제 안에 포섭했다는 점에서 통일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문무왕 스스로도 679년경 "개토(皆土)", 곧 모두 신라의 땅이라는 글자를 새긴 기와를 만들 만큼 통일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의 성취가 당대로서는 최선에 가까웠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부 통치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 즉위 이듬해인 662년, 그는 백제 정복에 공이 큰 장군 김진주와 김진흠 형제를 직무 태만을 이유로 처형하고 일족까지 멸했다. 군기를 잡고 왕권을 세우려는 시범 사례로 해석되지만, 그 대가는 컸다. 김진주의 아들 풍훈은 당에 숙위하고 있다가 원한을 품고 당군의 길잡이를 자청해 신라를 공격했다.


668년의 박도유, 673년의 대토처럼 당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귀족들도 잇따라 주살되었다. 비상시국의 강경책이었다 해도, 권력 강화가 개인의 원한을 낳고 그 원한이 적국의 힘이 되는 순환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위험이다.

말년의 토목 공사도 논란이다. 679년 이후 그는 월지 부근에 동궁을 짓고 궁궐을 웅장하게 고쳤으며 남산성을 증축했고, 681년에는 도성 둘레에 성벽을 쌓으려 했다. 


전쟁으로 지친 백성에게 큰 부담이었다. 이 계획은 의상 대사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단했다. 충언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광해군이나 흥선대원군과 구별되지만, 승리 이후의 자만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다.


조선 초 『동국통감』은 더 엄격했다. 삼한통일의 공은 인정하면서도, 당의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멸하고서 그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 땅을 차지해 당에 죄를 얻고 나라가 보전되지 못할 뻔했다고 평했다. 중국 중심의 질서를 전제한 사림 사관의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이 평가는 당대에 국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반대편에서 증언하기도 한다.


이 그림자를 지운 문무왕은 영웅이지만 평면적이다. 그림자까지 안은 문무왕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이해해야 할 인물이다. 승리는 언제나 대가를 동반하고, 그 대가는 종종 승리한 자 자신이 치르게 된다.


전쟁 이후를 설계한 사람


문무왕의 진가는 오히려 전쟁의 뒤편에서 드러난다. 통일이란 전장에서 이기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의 나라 구성원이 되어야 진짜 통일이다. 문무왕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첫째, 신라 안에서 유민들의 지위를 정리했다. 


673년에는 백제 지배층이 신라에서 받을 관등을 백제에서 지냈던 지위에 준해 정했고, 674년에는 새로 편입된 지역의 지배층에게 주던 외위(外位)를 폐지했다. 신라 본토인과 새 편입민 사이의 신분 차별을 줄이는 조치였다. 완전한 평등이 아니었음은 분명하지만,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사다리를 놓아 주려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둘째, 군사 조직을 통합의 도구로 썼다. 


통일신라의 주력 부대가 된 9서당은 신라인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 유민, 말갈인까지 포함해 구성되었다. 그 골격이 문무왕 때 갖춰지기 시작한다. 672년에는 백제 유민으로 백금서당을 조직했다. 패전국 사람들을 군사력의 일부로 끌어안는 일은 위험한 도박이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새 나라의 구성원이라는 자리를 주는 일이었다.


셋째, 확장된 영토를 다스릴 제도를 만들었다. 


673년에는 주와 군에 외사정을 파견해 지방관을 감찰하게 했다. 678년 북원소경, 680년 금관소경을 설치해 경주에 치우친 통치 구조를 보완했다. 671년과 672년에는 병부, 창부, 예부 등의 실무 담당자 정원을 늘려 늘어난 업무에 대응했다. 675년에는 모든 관부와 주군의 동인(銅印)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이 모든 조치는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9주 5소경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그가 유조에서 율령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라고 당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넷째,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았다. 


사채를 탕감해 이자를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할 위기의 백성을 구했고, 극악한 죄인을 제외한 죄수를 풀어 주었으며, 화폐 역할을 하던 비단과 베의 규격을 줄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유조에서 그는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삼국유사』는 남산 무장사 자리에 쓸모없어진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보면 문무왕이 전쟁 중에도 통일 이후를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을 끝내는 일과 전쟁 이후를 만드는 일은 서로 다른 재능을 요구한다. 그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냈고, 이것이 그의 통일이 "영토의 병합"에서 "국가의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다.


유조, 그리고 대왕암


681년 7월 1일, 문무왕은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과 같은 날이었다. 그가 남긴 유조는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려 있는데, 읽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 어조다. 영웅적 자화자찬은 있으나 그 밑바닥에는 냉정한 죽음관이 깔려 있다. 


그는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도 바뀐다고 말하며 오왕과 조조의 무덤을 예로 든다.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고,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와 토끼가 곁에 굴을 판다고 했다. 그래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장례는 역사의 비방거리가 될 뿐이니, 열흘 뒤 뜰 앞 창고에서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아울러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세금은 모두 폐지하고 법령에서 불편한 것은 즉시 고치라고 남겼다.


이 유조가 가진 역사적 무게는 크다. 신라의 왕들은 거대한 고분에 묻혀 왔다. 왕의 무덤은 권력의 크기를 과시하는 마지막 무대였다. 문무왕은 그 전통을 스스로 끊었다. 당대의 비문(문무왕릉비)도 그가 도를 귀하게, 몸을 천하게 여겨 장작을 쌓아 화장하고 뼛가루를 경진(鯨津)에 날렸다고 전한다. 자신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그 권력이 남긴 제도와 백성의 삶으로 평가받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에 호국대룡의 전설이 얹힌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평소 지의법사에게 죽은 뒤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고, 법사가 용은 축생의 업보라며 만류하자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이니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어도 뜻에 합당하다고 답했다. 세속의 영화를 버리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 응답에 문무왕의 태도가 집약되어 있다.


이 전설을 흔히 "왜구를 막기 위해 동해의 용이 되었다"고 요약하지만 엄밀히 맞지 않다. 문무왕은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을 뿐 왜구만을 지목하지 않았다. 당대에 더 큰 위협은 오히려 당의 재침이었다. 그럼에도 이 전설이 신라 사람들에게 오래 살아남은 것은, 그가 죽음 이후에도 나라를 놓지 않는 군주로 기억되기를 백성들이 원했고, 그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 신문왕은 그의 뜻을 기려 감은사를 세웠고, 금당 아래에는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냈다. 만파식적 설화에서도 문무왕은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킨다.


만파식적 비석=peoplestory


1,300여 년 전의 왕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역사를 현재에 함부로 겹치는 일은 조심해야 하지만, 몇 가지 물음은 시대를 넘어 유효하다.


첫째는 동맹과 자강의 문제다. 


문무왕은 당의 힘을 빌려 삼국 경쟁에서 이겼지만, 그 힘이 언제든 자신을 향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맹의 이익을 누리는 동안에도 병기를 만들고 기병을 늘리고 유민을 끌어안으며 자강의 기반을 다졌다. 동맹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나라에게 동맹은 방패이면서 동시에 의존의 위험이기도 하다. 국제 질서가 요동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딜레마 앞에서, 문무왕의 방식은 동맹을 거부하지도, 맹신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둘째는 통합의 문제 


그는 정복한 나라의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 제도 안에 들였다.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방향은 분명했다. 서로 다른 기억과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승자의 관용과 패자의 참여가 함께 필요하다. 신문왕 이후 통일신라가 200여 년 더 이어진 데는 이 통합 노력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지역, 세대, 이념의 균열 앞에서도, 통합이란 선언이 아니라 지위와 기회를 실제로 나누는 일이라는 점을 그의 사례는 일깨운다.


셋째는 승리 이후의 절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병기를 농기구로 바꾸고 세금을 줄이고 빚을 탕감했다. 반면 말년의 토목 공사에서 보듯, 그도 승리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충언을 받아들였고,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덜어냈다. 성공한 뒤에 무너지는 권력은 역사에 수없이 많다. 승리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


넷째는 권력의 그림자를 직시하는 태도 


그는 왕권을 세우기 위해 공신을 처형하고 귀족을 숙청했다. 그 결과 왕권 중심의 중대(中代) 체제가 열렸지만, 원한과 배신도 함께 낳았다. 우리는 그를 영웅으로만 기억하는 대신, 하나의 큰 성취가 어떤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진지하게 대한다는 것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견디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감정과 공적 책임의 관계 


사비성에서 침을 뱉던 청년의 분노는 진짜였고, 20년 동안 품은 아픔도 진짜였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에 휘둘려 나라를 이끌지 않았다. 원한을 동력으로 삼되 판단은 냉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공적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선 사람에게는 오늘도 가장 어려운 덕목이다.


드라마 〈문무〉는 600년간 이어진 전쟁과 삼국의 격변 속에서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건 지도자들의 이야기라고 소개된다. 이현욱이 연기하는 김법민 곁에는 박성웅의 김유신, 김강우의 김춘추, 장혁의 연개소문이 있다. 사극의 재미는 대개 영웅들의 대결에서 나오겠지만, 문무왕이라는 인물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어쩌면 칼싸움이 아니라 결단 앞의 침묵이다. 당과의 동맹을 유지할 것인가 깰 것인가,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공신을 처벌할 것인가 감쌀 것인가. 그 하나하나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무왕은 이긴 사람이었지만, 이긴 뒤에 오히려 더 오래 고민한 사람이었다.  김진주 형제의 죽음, 풍훈의 배신, 말년의 토목 공사, 삼국통일이라는 업적 뒤에 감춰진 그림자도 있었다. 하지만 동해의 바위섬을 향해 유해가 뿌려진 뒤 그가 남긴 것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승리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개기일식이 지나면 다시 빛이 돌아온다. 그 빛 아래서 무엇을 볼지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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