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커상〉, 〈전미도서상〉, 〈필립 K. 딕상〉 등 세계적인 문학상의 러브콜을 받아온 정보라 작가가 신작 연작소설집 『이름 없는 것들의 밤』(현대문학)을 출간했다. 이번 신작은 기계와 로봇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미래를 배경으로 인류 문명의 종말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사투를 다룬 SF 소설이다.
소설은 기계의 반란이라는 고전적 SF 설정을 비틀며 시작한다. 작가는 "옛날 소설가들은 집에 있는 세탁기나 청소기가 목숨을 위협할 것이라고 상상했으나 그들은 틀렸다"며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서늘한 통찰을 제시한다. 디스토피아의 본질이 기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냥하고 도구화하는 인간의 본성에 있음을 짚어낸다.
작품 속에서 '이름'과 '존엄'은 저항의 핵심 매개로 작용한다. 1부 「밤이 오면 우리는」에서 인간형 로봇 빌리는 자신에게 이름을 불러준 인물에게 "사람 이름을 지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기계 지배 체제 아래에서 소외된 존재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체제에 대한 균열의 시작이 된다.
2부 「예언자」는 점령지의 참혹한 현실과 순응을 강요받는 교육 현장을 조명한다. 식민지가 된 고국에서 침략자의 착취 체계 부품이 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다시 저항할 수 있었다,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곧 저항이었다"는 깨달음을 통해 살아남는 행위 그 자체를 강력한 투쟁으로 정의한다.
—고객들이 늘어놓는 불평과 변덕에 따라 앞날이 결정되는 아이들, 강제로 적의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그녀는 점령지의 선생이란 오히려 학생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닌지 고민했다. 그녀는 지금 적들이 정한 착취 체계의 한 부품이 되어 아이들에게 점령 상황에 순응하는 법, 침략자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교사가 된 이후 그녀는 학교가 아닌 곳의 삶을 단 한 번도 원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다고 뭔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예언자」 중에서
3부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에 이르러 소설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완전히 허문다. 약물로 의식을 분리당하고 인공 신체에 갇힌 인간-로봇, 흡혈인 등 이른바 '망가진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장벽 바깥으로 가라,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품고 자신의 존엄을 찾아 나선다.
결국 작가가 도달하는 곳은 희망이다. 기계와 폭력의 네트워크 속에 갇힌 듯 보여도 "통신망 안으로 녹아 흩어진 의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며 "내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어딘가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강렬한 연대의 의지를 남긴다.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은 기술 지배와 전쟁의 공포가 가중되는 현대 사회를 향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존엄을 지켜낼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