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6일 -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한 항구적인 국제기구 설립

peoplestory 기자

등록 2025-06-26 01:47

유엔 헌장 최종 서명 AI 이미지

  • 1483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가 즉위
  • 리처드 3세의 즉위는 잉글랜드 역사상 논란과 비극의 상징이다. 그는 형 에드워드 4세의 어린 두 조카를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며, 장미 전쟁의 혼란을 극대화했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은 법률 개혁 등 일부 긍정적인 정책도 있었으나, 왕위 찬탈의 과정과 조카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후대 튜더 왕조에 의해 '폭군'으로 각인되었다. 리처드 3세의 죽음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종말을 알리고 튜더 왕조의 시작을 가져온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 1794년: 플뢰뤼스 전투
  • 1794년 6월 26일 벌어진 플뢰뤼스 전투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 저지대 지방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이 전투는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를 영구적으로 장악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플뢰뤼스 전투는 군사 역사상 최초로 정찰용 기구('르엔트레프레낭'이라는 수소 기구)가 전장에서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로 기록된다. 프랑스군은 기구를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승기를 잡았으며, 이는 전장의 개념을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승리는 프랑스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가 완화되는 데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 1840년: 아편 전쟁 발발
  • 1840년 6월 26일 발발한 아편 전쟁은 영국과 청나라 간의 무역 갈등에서 시작된 충돌이다. 영국이 대중국 무역 적자를 해소하고자 인도산 아편을 대량으로 밀수출하며 청나라에 아편 중독이 만연하고 은 유출이 심화되자, 청은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소각하는 강경책을 펼쳤다. 이에 영국은 자국 상인 보호와 무역 자유를 명분으로 군사적 행동에 나섰고,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편 전쟁은 청나라의 근대화와 서양 세력의 침투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 1887년: 독일과 러시아의 재보험 조약 체결
  • 1887년 6월 26일, 독일과 러시아는 비밀리에 재보험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구축한 복잡한 동맹 체제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을 막아 독일이 양면 전쟁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이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한쪽이 제3국과 전쟁할 경우 다른 한쪽은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후 빌헬름 2세 황제에 의해 갱신되지 않아 소멸했다. 재보험 조약의 불발은 러시아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진영 구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재보험 조약은 당시 유럽의 불안정한 국제 관계와 동맹 외교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 1945년: 유엔 헌장 최종 서명
  • 1945년 6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기구 회의에서 50개국 대표들이 유엔 헌장에 최종 서명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를 위한 항구적인 국제기구를 설립하려는 염원의 결과물이다.

    유엔 헌장은 국제연합의 근본 조약이자 국제법적 기반으로, 회원국의 주권 평등, 무력 사용 금지, 분쟁의 평화적 해결 등 핵심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이후 10월 24일 발효되면서 국제연합(UN)이 공식 출범했으며, 이는 국제 질서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나 최근에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이틀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은 이틀째인 6월 26일에도 급박하게 전개됐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했고, 한국군은 미처 방어선을 구축할 틈도 없이 밀렸다. 수도 서울 외곽까지 전선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공격 중지와 철수를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며 국제 사회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전황은 여전히 북한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갔으며, 한국 정부는 대전으로 임시 수도를 옮기는 등 비상 상황에 놓였다.


  •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베를린 장벽 연설
  •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서독 베를린을 방문해 베를린 장벽 연설을 했다. 동독의 베를린 장벽 건설로 공산주의의 위협과 분단의 고통을 겪던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희망과 지지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는 연설 말미에 독일어로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고 외치며 서베를린 시민들과의 강력한 연대감을 표현했다. 이 연설은 냉전 시대 자유 세계의 단결과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명연설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 1964년: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안 국회 통과

  • 1965년 6월 26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안이 통과된 것은 굴욕적인 대일 외교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민적 반대와 격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경제 발전을 위한 '종자돈' 확보를 명분으로 협정을 강행했다.

    이 조약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강제 징용 등 개인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소멸시켜 버렸다. 이는 피해자들의 정당한 배상 요구를 외면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불완전한 청산을 초래하여 오늘날까지도 한일 관계의 주요 갈등 요인으로 남아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971년: 일본 오키나와가 반환 협정 조인
  • 1971년 6월 26일,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조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가 1972년 5월 15일 일본으로 최종 반환되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주권 회복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미국의 태평양 전략 변화와도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협정 내용은 미군 기지의 축소나 철수 없이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오키나와 주민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핵무기 반입 문제 등은 비밀 협정 의혹을 낳으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여전히 주일 미군의 핵심 기지 역할을 담당하며, 이는 지역 사회에 지속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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