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를 땄다. 오늘 지나면 못 먹는다는 성화에 양은 냄비 들고 급하게 갔는데, 띄엄띄엄 달린 것 같아도 다 따고 보니 한 바가지다. 푸짐하다.
시장 난전에서 식목일 전에 회초리같이 길쭉한 가지 하나 사다 심은 게 벌써 8년 전이다. 대추나무도 심고 앵두나무도 같이 심었는데 열매는 보리수만 구경한다. 왕보리수이긴 하지만 올해 유독 알이 굵다. 대추나무도 심었는데 아직까지 대추알을 본 적이 없다. 앵두나무도 같이 샀었는데 어디다 심었을까? 해마다 이맘 때만 한 번씩 사라진 앵두나무의 행방을 궁금히 여기곤 한다.
외도를 했다. 딱 2년...
석사 과정을 논문 통과까지 끝냈다. 논문 끝나고 한숨 돌리고 싶었는데 몇 달에 걸쳐 쉬지 못할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쓰러졌다. 장렬하게...다행히 전사 직전 구출? 아무튼 살아있다. 회복이 좀 더디다. 내달리던 속도가 제어가 안 되어 넘어진 것 같다. 넘어지긴 넘어졌는데, 좀 세게 넘어진 기분이다. 스스로를 뿌듯하고 대견해 하던 마음에 그늘이 든다. 그늘에서 헤매는 중에 보리수 열매 따는 단순한 행위가 나를 구한다. 모종만 사다 주고 쳐다도 안 보던 텃밭이 이제야 겨우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고추모는 매운 거, 덜 매운 거, 신품종이라고 종묘사에서 권한 것까지 세 가지나 심었다. 토마토는 짭잘이 찰토마토와 기본에 충실한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재작년엔가 신품종이라고 권하는 거 심었다가 줄기가 호박처럼 번져서 난감했던 경험 때문에 신품종을 맹신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분야가 그렇듯 종묘상에도 해마다 신품종이 늘어난다. 대개는 시기적으로 트렌드인 입맛을 따라가는 품종들이 개발되는 것 같다. 지중해식 샐러드 요리로 곁들일 만하거나 당도와 식감이 강조되고, 거기에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가미된 품종들이 출시된다. 토종 채소들도 이러한 추세에 맞춰 신품종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신품종이 꼭 내 입맛과 맞는 것은 아니므로 같이 먹을 사람들의 식성을 고려하여 상추도 세 가지 품종을 심었고, 당귀도 심었다.
이런저런 모종 값이 총 8만원 가까이 들었다. 한 포기에 2천원짜리도 있고, 2천원에 세 포기 하는 것도 있었다. 모종 심어 주신 분이 여기 심은 거에서 8만원어치 따먹을 수 있으려나 하신다. 본전 빼려면 열심히 먹어야 한다. 여름에 풋고추랑 된장 고추장 찍어먹을 생각에 흥이 난다. 시장에서 8만원어치 야채 사 먹는 것 이상의 에너지원이다.
열 평도 안 되는 이 텃밭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품목은 부추와 도라지, 더덕이다. 텃밭 시작 초창기에 심었는데, 해마다 겨울을 나고 자라는 모습이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토종 영양부추는 향도 좋고 맛도 좋고 생명력 번식력이 대단해서 나눔을 참 많이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양이 엄청 많다.
도라지와 더덕은 뿌리를 먹어야 하는데, 한 번도 캐 먹은 적이 없다. 관상용이다. 도라지꽃도 예쁘지만, 더덕꽃도 상당히 기품 있고 고급지다. 특히나 비에 젖은 보랏빛 더덕꽃은 한복 입은 채 비에 홀딱 젖은 양반집 아씨 같은 자태다. 꼭 비 오는 날 혼자서 아무도 몰래 봐야 하는 꽃이다.ㅎ
텃밭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에 기운이 난다. 부엌칼을 가져다가 오랜만에 부추를 베어본다. 향긋한 부추향이 콧속으로 파고든다. 부추를 다듬고 보리수를 씻어 나눈다. 모종을 정갈하게 심어 주신 동네 큰오빠 같은 분들과 나눠먹어야지...
황은주 작가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