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메리칸 스토리가 아니야. 아일랜드 스토리야."

uapple 기자

등록 2026-07-04 15:49


역사는 종종 개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무게의 옷을 입힌다. 그 옷이 대의라는 이름을 가질 때, 개인의 삶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유작이 된 1997년 작 『데블스 오운(The Devil's Own)』은 바로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마주친 두 남자의 비극적 연대기와 피할 수 없는 신념의 충돌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북아일랜드 분쟁이라는 무겁고도 복잡한 정치적 배경을 뉴욕이라는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으로 끌고 와, 두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 해리슨 포드와 브래드 피트의 팽팽한 연기 대결을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각본이 여러 차례 수정되고 배우들과 제작진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브래드 피트 본인이 한 인터뷰에서 제작 과정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평단의 반응 역시 엇갈렸다 — 로저 이버트를 비롯한 여러 평론가는 두 주연 배우의 연기력 덕분에 영화가 겨우 지탱된다고 평했을 뿐, 정치적 배경 설명이 피상적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 지금, 『데블스 오운』은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 스릴러의 틀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와 정체성의 비극을 다룬 심리 드라마로 재조명되고 있다.


1972년 북아일랜드, 여덟 살의 어린 프랭키 맥과이어는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아버지가 무장한 괴한들에게 살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이 참혹한 기억은 소년의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갔고, 성인이 된 프랭키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핵심 투사이자 가장 치명적인 요원으로 성장한다. 영국의 소탕 작전을 피해 '로리 디바니'라는 가명으로 뉴욕에 입국한 그는 스팅어 미사일을 구입해 고국으로 밀항하려는 비밀 임무를 띠고 있다.


그의 미국 정착과 신분 위장을 돕는 아일랜드계 법조인 피터 피츠시몬스는 로리를 뉴욕 경찰청의 베테랑 경사 톰 오미아라에게 소개하여 그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한다. 톰은 평생 법과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정직한 경찰이자, 아내 실라와 세 딸을 둔 자상한 가장이다.


같은 아일랜드계 혈통이라는 유대감 속에서 톰의 가족은 로리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로리 역시 오랜 투쟁 생활에서 잊고 지냈던 평범한 가정의 온기를 맛보며 톰과 깊은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나 무기 밀매상 빌리 버크와의 갈등으로 로리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톰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며 로리라는 인물의 실존적 고뇌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는 이것이다.


"It's not an American story. It's an Irish one."

(이건 아메리칸 스토리가 아니야. 아일랜드 스토리야.)


톰이 "그놈들은 잡았냐"고 묻자 로리가 내뱉는 이 짧은 답변은, 자신의 투쟁과 삶의 궤적이 미국적 관점이나 서구 주류 사회의 법과 정의의 잣대로는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음을 단언하는 선언이다.


미국이라는 공간은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톰의 가정으로 대변되는 안전한 울타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하지만 로리에게 그 평화는 일종의 신기루이자 타인의 현실일 뿐이다. 그의 내면은 여덟 살 때 멈춰버린 아일랜드의 피비린내 나는 길거리에 머물고 있다.


로저 이버트는 당시 리뷰에서 영화가 아버지를 죽인 쪽이 영국군인지 개신교 민병대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즉 정치적 맥락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감정적 신호에만 의존한다는 점을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해리슨 포드와 브래드 피트, 두 배우의 매력과 연기력이 논리적으로 허술한 장면들까지도 설득력 있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로리에게 아일랜드 스토리는 탈출할 수 없는 운명이자 굴레다. 미국인들이 누리는 일상적 행복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사치이며, 그가 뉴욕에서 행하는 모든 비밀스러운 행동은 오직 고국의 비극을 끝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톰 오미아라는 미국적 시스템과 법치주의, 그리고 가부장적 평화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해리슨 포드는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중년 경찰의 고결함과 고집스러움을 특유의 묵직한 연기로 표현해 낸다. 그에게 집은 세상의 모든 폭력과 범죄로부터 가족을 지켜내는 신성한 구역이며, 그 구역을 지탱하는 힘은 법이다.


톰의 이 확고한 신념은 로리가 처한 폭력의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로리는 톰의 가족 안에서 일시적인 안식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과 톰이 제공하는 평화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는다.


버라이어티지는 당시 리뷰에서, 이 영화가 상업적 각색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파큘라 감독이 '아일랜드 테러리스트의 이해할 만한 정치적·감정적 복수 동기'와 '점잖은 경찰관의 도덕관' 사이의 중심 대립 구도만큼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다만 영화가 결국 톰이 대변하는, 폭력의 악순환에 반대하는 입장 쪽으로 무게중심을 싣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로리는 톰의 따뜻한 가정을 보며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평화의 실체를 목격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자신이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평화를 깨뜨려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법 집행관으로서의 톰은 대의를 핑계로 행해지는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수 없다. 로리의 정체와 그가 벌인 사건들을 알게 된 톰은 분노와 배신감 속에서도, 정작 FBI와 영국 측이 로리를 사살하려 할 때는 이를 막아서며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 한다. 이는 로리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자, 자신이 믿는 법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두 남자의 피할 수 없는 추격전으로 치닫는다. 결국 항구에 정박한 낡은 어선 위에서 벌어진 마지막 격돌에서 로리는 총상을 입고, 로리를 향해 총을 겨눴던 톰 역시 총에 맞는다. 로리는 톰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톰은 죽어가는 로리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워왔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대사보다 침묵이 더 크게 다가오는 장면이다.


많은 관객들이 이 마지막 장면에서 깊은 여운을 느꼈다고 말한다. 로리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아일랜드라는 이름의 오랜 굴레에서 놓여난 것일지도 모른다.


앨런 J. 파큘라 감독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클루트』, 『소피의 선택』 등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탁월한 심리 묘사와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이 작품에서도 이어가려 했다. 상업적 스릴러 문법 속에서 초반의 묵직한 주제 의식이 다소 희석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인물들의 내면을 파고드는 그의 시선만큼은 그의 마지막 작품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이 영화는 실제로 파큘라 감독이 199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 되었다.


『데블스 오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는 정의는 과연 절대적인가. 타인의 고통과 역사의 비극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내리는 법적 판단은 온전한 정의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어떤 역사적 아픔이 있다 한들 무고한 이들의 피를 대가로 치르는 투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로리의 '아일랜드 스토리'와 톰의 '아메리칸 스토리'는 결국 한 배 위에서 비극적으로 만났다. 대의라는 이름의 굴레를 쓰고 거친 바다를 헤치던 청년과, 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치고 가족과 평화를 지키려던 중년 경찰의 만남은 비록 파국으로 끝났지만,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uapple

uapple

기자

피플스토리 uapple
등록번호경기 아54185
등록일자2024-09-09
오픈일자2024-09-20
발행일자2026-07-25
발행인장기영
편집인장기영
FAX050)4433-5365
이메일peoplestorynet@nate.com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호수로 358-25
uapple

피플스토리 uapple © PEOPLE STORY All rights reserved.

피플스토리 uapple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