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해부학, 그리고 법정의 심리학: 영화 ‘뉘른베르크(2025)’가 던지는 질문
AI(제미나이)가 그린 <뉘른베르크>의 한 장면
2025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TIFF)에서 첫선을 보인 제임스 반더빌트 감독의 영화 <뉘른베르크>는 단순한 역사 드라마를 넘어,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악의 평범성과 그 악을 심판하려는 정의의 복잡한 투쟁을 다룬 작품이다. 잭 엘 하이의 논픽션 <나치와 정신과 의사>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전범들을 기소하기 위해 마련된 뉘른베르크 재판의 막전막후를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괴물과 마주한 인간: 켈리와 괴링의 위험한 왈츠
영화의 중심축은 미 육군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라미 말렉 분) 소령과 나치 독일의 2인자이자 루프트바페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러셀 크로우 분)의 심리적 대결이다. 켈리의 임무는 단순했다. 재판을 앞둔 나치 전범들이 법정에 설 수 있는 정신적 상태인지를 감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켈리의 야심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이 ‘괴물’들을 해부하여 그들의 뇌리에 박힌 악의 근원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인류가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할 ‘백신’을 만들고자 했다.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괴링은 압도적이다. 그는 평면적인 악당이 아니다.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이며, 때로는 지적이면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다층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크로우는 특유의 존재감으로 괴링의 나르시시즘과 카리스마를 스크린에 복원해냈다. 반면 라미 말렉은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쓰면서도, 괴링이라는 거대한 심연에 조금씩 잠식되어가는 켈리의 위태로운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켈리가 괴링의 신뢰를 얻기 위해 그와 교감을 시도할수록, 관객은 마치 ‘양들의 침묵’의 한 장면처럼 포식자와 관찰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영화는 한나 아렌트가 제창한 ‘악의 평범성’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주력한다. 스크린 속 나치 지도자들은 뿔 달린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가족을 사랑하고, 농담을 즐기며, 자신의 신념이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고 굳게 믿는 ‘보통의 인간’들이다. 켈리는 그들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며 그들이 특별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현대 사회에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다. 제임스 반더빌트 감독은 1945년의 풍경 속에 21세기의 정치를 교묘하게 투영한다. “그는 우리를 다시 독일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는 괴링의 대사는 과거의 망령이 아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득세하는 포퓰리즘과 민족주의의 선동 문구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악은 특별한 미친 천재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를 거부하고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기를 자처한 평범한 이들에 의해 완성된다는 진실을 영화는 끈질기게 파고든다.
법의 정의인가, 복수의 연출인가
미 대법관 로버트 잭슨(마이클 섀넌 분)의 서사는 영화에 법적, 윤리적 무게감을 더한다. 전례 없는 국제 군사 재판을 조직해야 했던 잭슨은 복수 대신 ‘법치’를 선택한다. 나치를 즉결 처형해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과 달리, 잭슨은 그들에게 변호의 기회를 주고 증거를 통해 유죄를 입증하고자 한다.
영화는 재판 과정을 묘사하며 실제 홀로코스트 수용소의 기록 영상을 과감하게 삽입한다. 약 5분간 이어지는 이 참혹한 영상은 극 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극장의 관객들마저 압도한다. 웅장한 음악이 멈추고 정적 속에서 상영되는 수용소의 풍경은, 언변과 논리로 무장했던 괴링조차 잠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는 영화적 장치를 넘어, 역사의 증언으로서 관객에게 윤리적 각성을 요구하는 감독의 의도가 십분 발휘된 지점이다.
"전통적이지만 강력한 역사 드라마"
평론가들은 <뉘른베르크>가 최근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정통 오스카 스타일'의 영화라는 점에 주목했다. 영화는 148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 동안 뉘른베르크 감옥의 회색빛 분위기와 법정의 엄숙함을 진중하게 담아낸다.
평론가들은 영화가 나치의 전쟁 범죄를 다루는 방식에서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게 샀다. 실제 재판에서 사용되었던 수용소의 참혹한 기록 영상을 영화 속에 그대로 삽입한 선택은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선사하며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각본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전반부는 켈리와 괴링의 심리적 체스 게임에 집중하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법정 드라마로 급격히 전환되는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못하다는 의견이다. 또한, 아론 소킨 식의 빠른 대사 처리가 역사적 비극의 무게를 가끔 가볍게 만든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일반 관객들의 반응은 전문가들보다 훨씬 뜨거웠다. 로튼 토마토 관객 점수 95%라는 기록적인 수치가 이를 증명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단순히 80년 전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읽힌다는 점에 열광했다.
많은 관람객은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를 보았다"거나 "악은 초자연적인 괴물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는 소감을 남겼다. 특히 실제 켈리 박사의 비극적인 결말을 다룬 에필로그는 많은 이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가 괴링의 심리를 분석하며 내린 결론, 즉 "이런 일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현대 관객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파멸로 끝난 탐구: 켈리의 비극적 최후
영화의 에필로그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악의 본질을 규명하려 했던 켈리 소령은 결국 자신이 관찰했던 괴링과 같은 방식(청산가리 복용)으로 생을 마감한다. 괴물의 심연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나머지, 그 자신이 심연에 먹혀버린 것이다. 그는 나치 지도자들에게서 특별한 ‘악의 유전자’를 찾지 못했다. 대신 그가 발견한 것은 누구나 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인간 본성에 내재된 파괴적 욕망이었다.
‘뉘른베르크’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148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심문한다. 당신은 정의와 복수를 구분할 수 있는가?
uapple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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