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야생란 외길 고인수 대표가 말하는 난초의 철학과 한국 춘란의 가치
"난초는 말을 못 할 뿐이지, 온몸으로 표현한다. 잎 끝이 타들어가면 물이 부족하다는 신호고, 떡잎장이 변하면 과습이라는 경고다. 숙련된 재배자는 그 색깔과 모양만 보고도 난초의 마음을 읽는다. 이건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느낌의 영역이다."
난초를 흔히 '식물의 귀족'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귀족을 모시는 일은 결코 우아하기만 한 과정이 아니다. 습도를 좋아하면서도 과습은 거부하고, 바람을 원하면서도 거친 풍랑은 싫어하며, 햇볕을 갈구하면서도 직사광선에는 잎을 태워버리는 까다로운 존재. 이 섬세한 생명체와 30여 년간 동고동락하며 전국 산천을 누빈 야생란 전문가 고인수 대표를 만났다. 그는 난초를 단순히 관상용 식물이 아닌, 주인과 영혼을 나누는 '고등식물'이라 정의한다.
섬세함의 극치, 왜 남성들이 난초에 열광하는가
고인수 대표는 인터뷰 시작부터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다. 난초를 깊이 있게 키우는 이들의 80%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식물 재배나 가드닝이 여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흔히 여자들이 더 섬세하고 정교해서 식물을 잘 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난초는 그야말로 '반응기 식물'이다. 통풍이 조금만 어긋나도 뿌리 활착이 안 되고, 광합성 효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이 미세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쏟아붓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고 대표는 살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들의 환경적 제약을 원인으로 꼽았다. 난초는 정확한 시간에 비료를 주고, 정확한 타이밍에 물을 주며, 시시각각 변하는 온도와 광량을 맞춰줘야 하는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들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퇴직 후나 여가 시간에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난실에 매달리는 경향이 강하다"며, "이런 집요함과 몰입도가 난초라는 까다로운 생명체를 길들이는 동력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두고 "멋지게, 그리고 굵게 미치는 취미"라고 표현했다.
눈 속에서 발견한 생명력, 보춘화(報春花)와의 만남
고 대표가 난초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서산의 어느 겨울산에서 목격한 경이로운 광경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 산등성이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데 유독 작은 소나무 아래만 동그랗게 눈이 녹아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자리에 난초가 있었다. 평범한 보춘화(민춘란)였다. 그 추위 속에서도 꽃봉오리를 품고 주변의 눈을 녹이며 서 있는 모습이 어찌나 강인하고 신비롭던지. 그때 깨달았다. 아, 저게 바로 생명이구나."
그가 말하는 '민초'와 같은 보춘화는 우리 산하 어디에나 있는 흔한 난초였지만, 그것이 품은 변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고 대표에 따르면 한국 춘란의 변이종은 학계나 애란인들 사이에서 150여 가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는 실질적으로 100여 가지 정도의 뚜렷한 변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산반, 복륜, 중투, 단엽 등 하나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와 환경과 토양, 온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인간의 유전자 조작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다.

"난초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안다"… 과학을 넘어선 교감
인터뷰 중 가장 놀라운 대목은 식물과의 '교감'에 대한 부분이었다. 고 대표는 난초를 '고등식물'이라고 단언했다. 단순히 물과 빛으로 자라는 유기체가 아니라, 주변 환경과 사람의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난초는 말을 못 할 뿐이지, 온몸으로 표현한다. 잎 끝이 타들어가면 물이 부족하다는 신호고, 떡잎장이 변하면 과습이라는 경고다. 숙련된 재배자는 그 색깔과 모양만 보고도 난초의 마음을 읽는다. 이건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느낌의 영역이다."
그는 심지어 난초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 패턴을 기억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잎에 정밀한 측정 장치를 달아 실험해보면, 평소 정성을 다해 돌보는 주인이 다가올 때와 낯선 이가 가위를 들고 다가올 때 난초가 발산하는 파동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난초는 자기가 처한 환경이 스스로를 지키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꽃을 말려버리거나 잎을 떨어뜨린다. 종족 번식보다 생존을 우선시하는 영리한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이토록 까다롭고 영특한 존재를 맞추려다 보니, 난초 키우는 사람들은 대개 성격이 보통이 아니다. 한 가지에 매몰되는 글쟁이들처럼 외골수 기질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왜곡된 한국 난초 문화, "중국 난초가 왜 우리 사찰에 있는가"
고 대표는 우리 난초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과거 충북 진천의 한 사찰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개탄했다. 사찰 내부 벽화에 십장생과 함께 난초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이 한국 춘란이 아닌 중국의 '일경구화'였기 때문이다.
"꽃대 하나에 여러 개의 꽃이 피는 일경구화는 중국 난초의 특징이다. 반면 우리 한국 춘란은 꽃대 하나에 오직 하나의 꽃망울을 틔우는 '일경일화(一莖一花)'의 절제미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화가들이나 관리인들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중국 난초를 그려 넣는다. 이는 우리 문화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는 중국이 한국을 자신들의 문화권에 종속시키려 하는 '동북공정'과 같은 맥락에서 난초 문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심이 벌어져 화려함을 뽐내는 중국·일본 난초와 달리, 봉심을 단정하게 오므리고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는 한국 춘란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선비 정신을 닮았다는 설명이다.

수입산에 점령당한 화훼 시장, 한국 춘란의 보급화가 해답
현재 국내 선물용 난초 시장의 90% 이상은 대만이나 중국에서 건너온 수입산이 차지하고 있다. 고 대표는 이에 대해 "외화 낭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야생화 가치를 사장시키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전라도 함평 등지에서 재배되는 '태극선'과 같은 우수한 국산 종자를 예로 들며 보급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태극선은 키도 크고 화려해서 충분히 선물용으로 경쟁력이 있다. 굳이 수입산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고 대표는 자신이 보유한 400여 분의 난초 중 20%를 물물교환을 통해 업그레이드하며 더 좋은 종자를 퍼뜨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고인수 대표에게 난초는 취미를 넘어선 삶의 동반자다. 충북 단양에서 일할 때도 난초에게 물을 주기 위해 왕복 500km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던 그 열정이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다.
"난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들인 열과 성만큼 보여준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우리 야생란의 숨겨진 꽃의 비밀을 찾아내고, 그것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데 쓰고 싶다. 한국 춘란의 그 단아한 봉심 속에 담긴 자존심을 지키는 일, 그것이 나의 소명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돌아본 그의 난실에는 수백 개의 잎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바람을 타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명의 진동, 고인수 대표는 오늘도 그 소리 없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진•인터뷰=피플스토리
uapple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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