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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열망과 죄의식과 수치가 빚어내고 재현하는 시간 (2)
  • 진주 작가
  • 등록 2024-10-05 14:50:32
  • 수정 2024-10-25 19: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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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수아 <회색時>과 최인훈 <광장>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회색인>과 함께 곁들여 보기



"그 이후로 우리는 어디에서나 함께였다. 내가 수미의 뒤를 따라가지 않으면, 수미가 내 뒤를 따라왔다. 비록 언제나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는 있었으나 나는 내 생애 동안 유일하게 진정으로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 회색時 중에서 


이런 화자의 고백은 오랜 열망의 시간을 통해 빚어낸 상상의 시간일 뿐이며, 화자는 그 과정 속에서 기꺼이 수미에게 복종의 자세를 취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존재가 아닌 타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실체 없는 미래에 도래할 ‘수미는 점차 회색빛으로 변해갔’고, ‘회색빛 옷을 입고 기묘한 모습으로 식탁 곁에 서 있으며 명령을 기다리고 주문을 받아 적은 다음 음식을 날라올 것이’며,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우리들은 아직도 주문한 저녁 식사가 날라져 올 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오래도록 갈망한 일은 이렇게 사람의 기억 속에서 변함없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들을 되짚어 볼 때, ‘회색時’는 감정의 영역이자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열렬히 갈망하고 열망하면서 미래에 꼭 일어나기를 바라마지않는 시간의 색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것은 또 일종의 죄의식에 닿아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도대체 회색빛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자면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회색빛 축축한 아침에 회색빛 담을 따라 회색빛 거리를 지나가는데 그를 뒤따라가 길 옆의 회색빛 운하 에 슬쩍 밀어 넣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오직 회색 물방울 몇 개만으로······


그렇다면 화자에게 죄의식이란 어떤 것일까? 


"지나간 시간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결국은 수치이자 죄의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중략) 행복하지 못하다는 감정이 죄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무언지 모를 막연한 자신의 과실로 인 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순간들을 그대로 헛되게 흘려보냈다는 과도하게 예민한 책임 김에서 기인한다.(중략) 죄의식은 그 자체가 곧 과거의 보편적인 거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어느 순간의 빛나는 기억조차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 된 이상 수치나 죄의식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 변해버린다." - 회색時 중에서


그 수치는 어리석음에 관 한 것이고 무지와 경솔함에 대한 도덕적인 수치이며 필연적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깊은 환멸과 회의로 종결된다. 수치의 쌍둥이이자 더욱 견고하고 지속적인 형태인 죄의식은 개인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행위의 내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기 관에서 효소처럼 비밀스럽게 분비되어 배출되는 일 없이 일생 동안 조금씩 쌓이는 매우 비선택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일생 동안 어떤 윤리적인 판단의 기로에서 어떤 선 택을 했다 할지라도 죄의식,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자의 진술에 의하면 죄의식은 과거와 관련된 수치심과 관련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숙명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화자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과 관련된 사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데, 그것은 마치 미셸 푸코가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에 대한 사유와 분석을 펼칠 때와 비슷한 논조임을 눈치 채게 된다. 


시간이 스스로를 관통하는 방식은 짐작되는 것보다 훨씬 더 임의적이고 즉흥적이어서 우리들의 세계에 보이는 것과 의식하는 것 사이에 거짓의 거울의 벽을 장치해 놓은 것과 같다. 그리하여 내가 믿지 않는 것의 리스트 중에는 모든 지나간 일들의 얼굴이 있다.


바로 이 ‘보이는 것과 의식하는 것 사이’에 놓인 ‘거짓의 거울의 벽’은 현실적으로는 도래하지는 않았으나 강렬하게 열망하는 미래의 모습이다. 죄의식과 수치심이 빚어내는 회색빛 시간대의 그 일은 ‘재현되는 것에 비해서는 관념적이지만 또한 재현이 가능해지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있는 거울 속 프레임 안에서 화가를 응시하는 초상화의 주인공들이자 그들의 또다른 얼굴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배수아 작가는 그러한 회색빛 프레임 안에다가 화자와 수미를 그리면서 독지로 하여금 그 프레임의 배경이 되는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회색의 잿빛 시간을 응시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찍이 좌우 어느 갈래에도 맘 편히 속하지 못하는 이념의 회색지대를 최인훈 작가가 그렸다면, 배수아 작가는 이 오래된 룰처럼 존재하던 회색빛에 새로운 프레임을 제작한 셈이다. 그 새로운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덧칠되었으나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색깔 “Time ln Gray”는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의 그림 「시녀들」에서 구현해 낸 ‘재현의 재현’을 위한 시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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