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의 『회색時』라는 소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한 편의 문학작품인 ‘시詩’였다. 그러나 검정과 하양의 분명한 색채 중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한 채 고뇌하는 자아의 이야기가 시처럼 아름답게 펼쳐질 것이란 기대를 가볍게 저버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을 나타내는 ‘시時’여서 오히려 구미가 당겼다. 영문명은 “Time in Gray". 회색의 시간, 잿빛 시간, 또는 회색 안에서의 시간···어감 상의 차이가 존재하긴 하지만, 어느 편이든 상관없이 ‘회색’이라는 색상이 주는 이미지와 ‘시간’에 대해 주목해 보기로 한다.
Gray는 검정과 흰색을 섞었을 때 나오는 색상이다. 검정색이 더 많이 섞여도 회색이고, 흰색이 더 많이 섞어도 회색이다. 그러나 회색은 검정과 흰색 사이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밝은 색감의 유채색을 이것저것 섞다 보면 색상들이 본래의 제 색상을 잃고 띄게 되는 묘한 색상. 바로 그 회색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며, 누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시간이란 말인가?
분단에 맞서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최인훈의 중편 『광장』에는 남쪽의 이념에도 북쪽의 이념에도 가닿지 못하고 제3국을 선택하는 과정에 스스로 증발을 택하는 주인공 ‘이명환’이 등장한다. 이 때의 이명환은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니고 좌·우의 어느 이념도 아닌, 정치적으로는 중립지대였으나 어떤 자리에도 뿌리내리거나 보호받지 못하고 죽음의 결말을 택한다.
그의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에도 역시 좌우 이념의 어느 축에도 끼기를 스스로 사양하고 고뇌의 날들을 즐기는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움직임의 손발을 갖지 못하고, 내다보는 창문만을 가진 인간형”으로 자처하며 아지트에 모여 과학과 성경 마르크시즘 사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담론을 즐긴다.
하지만 화자는 ‘키티’에 대한 이성적인 사랑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이념으로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중간색을 지칭하는 ‘그레이 구락부’라는 당을 결성했지만, 지식과 미모와 매력을 갖춘 여인 앞에서 여자와 남자가 아닌 그저 ‘동지’라는 애매한 관계의 색상을 유지할 수 없었던 피 끓는 젊음의 한 시절. 숨기고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고 만 그레이 구락부의 전말은 결국 회색에서 시작해 핑크빛 염문으로 마무리가 된 셈이다. 이념의 이쪽도 저쪽도 아니지만 남한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편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준은 『광장』 이명환의 또 다른 자아로서의 회색지대를 사는 이다.
최인훈이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이념의 좌우 갈래 사이의 중간 색상으로 ‘회색’을 차용했다면, 배수아가 그의 작품 『회색時』에서 보여주는 회색은 기억의 공간에 존재하는 시간의 색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기억이란 당연히 지나간 것 중의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것이므로 과거의 시간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떠올린 것들 중에 현재의 시점에서 전혀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들도 있을 테고, 아주 중요한 단서가 도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배수아의 『회색時』에서 화자는 ‘과거는 주로 미래의 한순간과 강하게 연결’된다고 보는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의식이 무심코 갈망한 우연’의 결과로 미래의 어느 날 도래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작중 화자인 ‘나’는 이십몇 년 전의 어느 시기에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러 다니던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깊이 빠진 수미라는 여자를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다. 그것도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 소련의 여객기 격추 사고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여자를 말이다. 양아들을 돌보는 수미에게 ‘나’는 과거의 어린 시절처럼 망설이지 않고 말을 건다. 과거엔 마음이 앞서서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시침을 떼고 관심 없는 척했다면, 미래의 어느 날 만난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의 감정이다.
이제는 수미를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닌라 도리어 경멸하는 마음까지 들면서도 나는 수미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화자의 의식 속에서 갈망한 상황에 대한 상상일 뿐이다. 독자는 이러한 점에 속아 마치 그 일들이 미래의 어느 날 벌어진 일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진주 작가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