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만큼 푸르고 깊은 하늘이 펼쳐진 차귀도를 품다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무인도인 차귀도에는 바다가 있다. 제주도가 온통 사방팔방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 새삼 무슨 이야기인가 묻는다면, 여유 있게 웃으며 차귀도에 한 번 다녀와 보시면 알게 될 거라고 전하고 싶다. 폭염주의보가 수시로 울려대는 나날이지만 제주도에 온 이상 주저 없이 차귀도로 향한다.
차귀도 유람선에서 내려 포구와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붕과 문짝이 없이 벽체만 일부 남은 폐가가 나온다. 무너지다 만 돌집이지만 더 이상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단단함이 묻어나는 묘한 장식물이다. 실제 사람이 거주했던 주택의 잔해이긴 하지만, 햇살과 바람과 하늘을 통째로 이고 있어서 왠지 우주의 신령한 기운과 닿아있는 듯 신비감이 깃들어 있다.
이 집을 지나자마자 정면으로 등대가 보이면서 양 갈래로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난 길은 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정상과 연결되는데 가파르다. 왼쪽으로 난 길이 등대로 향한다. 섬의 둘레를 따라 둥글게 난 길을 따라 등대까지 갔다가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면 된다. 등대를 지나 내려오는 길은 완만한 비탈길인데, 경사로를 따라 섬의 중앙을 살짝 비껴있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이어지는 길에 정상과 이어지는 길이 두어 개 더 있다.
나를 매혹시킨 이 섬의 매력은 이 왼쪽 길에 있다. 두어 개의 전망대 겸 쉼터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본섬인 죽도에 딸린 와도와 지실이섬, 장군바위 등을 찾아보다가 시선을 돌려 멀리 펼쳐진 바다를 보노라면, 무수한 햇살과 바다 표면의 물살이 만나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숨이 멎는다. 국어사전에서는 윤슬이라는 예쁜 단어로 이 현상을 표현하지만, 윤슬이라는 단어의 어감은 이 빛나는 시선 너머로 이어지는 중국과 일본 열도, 대만과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를 넘어 태평양과 남극해 이상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바다 너머를 담지 못한다. 그래서 이 드넓게 펼쳐진 반짝임 앞에서는 오히려 윤슬이라는 이 단어가 답답하다. 인간의 언어가 감히 담지 못하는 세계 앞에서 울컥, 숙연해진다.
이 왼쪽 길이 오른쪽으로 난 길보다 넓은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 방향을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엔 오른쪽 길로 가보기로 한다. 매번 왼쪽 길로 걸었으므로 이번만큼은 오른쪽에게 양보해 보는 것이다. 한두 사람이 겨우 몸을 부딪칠 듯 말 듯 걸을 수 있는 오솔길 양옆으로는 갈대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사람 키를 넘는 길이도 있지만 대개는 허리춤 정도의 높이를 벗어나지 않아 작은 섬 전체가 시야 안에 든다. 섬의 식물들에게 집중하면서 걷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보라색 해녀콩이나 노란 서양금혼초처럼 이 섬에서만 자라는 식물도 있고, 육지에서도 볼 수 있는 식물인 엉겅퀴나 갯기름나물도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멍석딸기도 한창 붉게 익어가고 섬 가장자리 쪽으로는 나리꽃도 활짝 피어 있다. 토양이 비옥하고 공기 중 수분이 충분하다 보니 대체로 잎들이 반들반들하다. 일조권을 맘껏 누리는 바다 한가운데 있다 보니 7월 땡볕의 꽃 색깔들도 선명하다. 섬의 안쪽을 바라보면서 목포지점인 등대를 향해 걷다 보면 가장자리는 높고 가운데가 낮은 분지 형태의 평야와 드넓고 맑은 하늘이 만나는 모습도 평화롭다.
자구내 포구를 출발한 차귀도행 유람선 안에서 구명조끼 착용 등 안전에 대한 안내를 받을 때 문득 뱀이 생각났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드문드문 뱀 조심 안내 문구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더위를 핑계로 샌들에 반바지를 착용했으니 조심스런 마음이 든 것이다. 차귀도 순례를 위해 긴바지를 챙겨왔음에도 숙소에서 나올 때 깜빡하고 손가방에 여름용 덧버선만 달랑 한 켤레 챙긴 것이다. 목이 긴 양말이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부주의했다. 뱀에 물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마음을 바꿔 먹는다. 차귀도에 사는 생물체 그 어떤 것 하나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행여 부지불식간에 내딛은 발걸음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뱀들의 행로나 쉼을 방해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의 발걸음으로 섬의 생명체 어느 것 하나에게도 침해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준비가 부족한 차림새 덕분에 섬에서의 발걸음은 사뭇 조심스럽다. 7월 중순의 한껏 자란 식물들은 다리와 허벅지를 스쳤고, 샌달에 덧버선만 걸친 발을 높이 들었다가 조심스레 내려 놓으며 바닥을 골라 짚어야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곤충이 흙길을 지나고 있었지만 의식을 해서인지 밟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다. 새끼인지 애인인지를 등에 업은 쌍메뚜기들이 유독 눈에 띈다. 다행히 내 발바닥이 그들을 밟지는 않았으므로 한편으로는 안심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겠지. 내 눈에 비치지 않는 작은 생물들이 무수히 많을 텐데 어떻게 그들을 밟지 않고 섬을 걸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고개를 드니 유독 많은 잠자리 떼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다. 땡볕에 여물어가는 벼이삭 들판도 아니고, 가을을 부르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 군락지도 아닌데, 어디 호수나 물웅덩이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많은 잠자리 유충들은 다 어디에서 서식하다 왔을까? 이런 의문은 아주 잠깐 사이일 뿐이다. 비록 덥고 뜨겁지만 맑고 투명한 하늘이 온통 하늘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하늘이 온통 펼쳐져 있다니 이 무슨 비문법적인 문장이냐고 비아냥거려도 할 수 없다. 차귀도 하늘 위로 온통 바다만큼 푸르고 깊은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어쩌랴.
차귀도 한가운데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이는 바다, 차귀도 한복판에 서서야 비로소 보이는 하늘에 흠뻑 취해 본다. 소망을 품은 간절한 내용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툭, 마음을 가두던 물꼬가 터지고 비로소 콸콸콸콸 흐르는 물살에 온몸을 내맡기는 데서 오는 듯한 자유로움이 거기에 있다. 차귀도를 찾는 이유다
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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