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믹((Mimic,1997)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뉴욕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원균의 확산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런데 이 질병이 바퀴벌레에 의해 균이 옮겨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뉴욕 주립대 곤충학 교수는 흰개미와 사마귀의 DNA 변형 유전자를 이용하여 ‘유다’라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 발퀴벌레를 박멸시켰다. 3년 뒤 유다의 씨앗은 DNA 변형을 일으키며 지하철 음습한 곳에 숨어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유다’라는 새로운 종을 없애기 위해 추격전에 나서지만 쉽게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괴물은 천적으로 여기는 인간의 모습을 빠른 속도로 닮아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천적을 닮아간다는 이 영화의 섬뜩한 가설은 실제 곤충세계에서 흔한 일이라고 한다. 먹이사슬에서 자신의 종족을 지키기 위해 천적을 닮아가는 일은 곤충세계에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종족 번식이 빠르기 때문에 DNA변형도 빠르기 때문이다.
‘천적을 닮아가는 곤충 이야기’를 화두로 꺼냈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느 한쪽은 죽고, 다른 한쪽만 살아남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천적 이야기를 꺼낸 것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서로 닮아갔다는 점에서 서로간에 반성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중동전쟁을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냉혹하고 끔찍하기만 하다.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간 경쟁, 민족간 경쟁이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곱씹어봐야 할 역사 속의 인물이 있다. 바로 1200년 전의 인물, 청해진의 장보고 대사이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시대에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20대 초반에 풍운의 꿈을 가지고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장보고는 무령군 군중소장이 되어 당나라를 위협하는 최대 번진(藩鎭)세력인 이정기 세력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번진은 절도사를 최고권력자로 한 당나라의 지방지배체제다.
그런데 이정기 장군은 '나당연합이 몰락시킨 고구려'의 유민 출신이었다. 이정기 장군은 당시 최대 번진세력이었던 안녹산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당나라를 구하고 입신양명 했지만, 그 와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새로운 고구려 건국을 꿈꾸었다.
장보고는 이정기 장군이 당나라에 의해 어떻게 궤멸되는가를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정기 장군이 남긴 모든 유산을 흡수하면서도 이정기 장군보다 더 진일보한 전략을 짰다. 이정기 장군을 뛰어 넘는 장보고의 전략이란 무엇일까?
하나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삼은 것이었다. 청해진은 동서양의 교류를 담당했던 육로 실크로드와 동북아시아 해상을 잇는 요충지었지만 신라 조정과 당나라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던 지역이었다. 당이나 신라 조정의 간섭을 배제하고 민간 중심의 평화로운 동북아 해상무역을 건설하겠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해상민병대를 구축했다. 청해진의 해상민병대는 평소에는 해상무역을, 비상시에는 군사 역할을 했다. 힘으로 평화를 강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장보고의 이런 전략은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신라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재당 신라인(신라, 백제, 고구려의 유민들)들과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주민들에게 경제적 비전과 희망을 제시했다. 더 나아가 육로와 해상을 잇는 해상무역을 통해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를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적대적 관계에서 서로 닮아가는 것은 어쩌면 통합을 이루는 단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한쪽이 죽고, 한쪽만 살아남는' 논리에 의해 천적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1200년 불안정한 정세에서도 동북아시아 지역에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평화를 이루어 낸 장보고의 리더십은 지금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움직이는 이정표다.
장기영 director 다른 기사 보기